[기자의눈]이완배/서글픈 ‘경찰 인권보호대회’

  • 입력 2000년 10월 23일 19시 08분


23일 오전 10시 경찰청 지하 강당과 전국 13개 지방경찰청에서는 ‘국민 인권보호 실천 다짐대회’가 열렸다. 최근 논란이 됐던 전교조 교사 ‘알몸수색’과 같은 일의 재발을 막고경찰관들의 인권보호 의식을 높이자는 취지의 행사였다.

하지만 ‘인권을 보호하자’는 지극히 당연한 이 대회를 바라보는 일선 경찰관들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한 경찰 간부는 “인권을 강조해온 대통령이 노벨상을 타니까 경찰 수뇌부가 그 기회를 이용해 ‘전시 행사’를 벌이는 것 아니겠느냐”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찰은 웬만한 인권침해 주장에 대해서는 무반응으로 일관해왔다. 3월 경기 성남 남부경찰서에서 선거법위반 혐의로 붙잡혔던 여성 피의자 3명이 ‘알몸수색’을 당했다며 여러 시민 여성 단체들이 공청회와 집회를 통해 줄기차게 관련자 사과 등을 요구했지만 무시했던 일이 있다.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한 경찰관은 “피의자의 인권이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도 안다. 하지만 지금같이 경찰관들의 근무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선진국형 인권 보호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솔직히 ‘피의자의 인권보호’보다는 ‘실적 올리기’에 대한 주문이 훨씬 더 많은 현실에서 일선의 실정을 모르는 ‘높으신 분’의 지시로 ‘대회’를 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반문했다.

경찰이 스스로 인권을 중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경찰관들의 근무환경이 개선되고 인권보호 의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 등이 먼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인권보호는 경찰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중 하나다. 이같은 ‘기본’이 제대로 안 돼 전국에서 수천명의 경찰관들이 모여 ‘인권보호 실천 다짐대회’를 여는 현실이 서글프다.

이완배<사회부>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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