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매화[이준식의 한시 한 수]〈351〉

  • 동아일보

백발 되어 눈보라 헤치고 장안 가는 길,

헤진 베옷, 지친 나귀, 헐거워진 갓끈.

고향 뜰 그 고운 매화를 등지게 되다니.

남쪽 가지엔 꽃이 피고 북쪽 가지는 차갑기만 할 텐데.

(白頭風雪上長安, 裋褐疲驢帽帶寬. 辜負故園梅樹好, 南枝開放北枝寒.)

-‘임청에서 만난 대설(臨淸大雪)’ 오위업(吳偉業·1609∼1672)


눈보라를 뚫고 북쪽 수도로 향하는 시인의 마음은 스산하기만 하다. 이미 백발의 나이, 옷은 낡았고 갓끈은 헐렁대고 나귀마저 지쳐버린 고달픈 여정이다. 여행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조정의 부름에 응하는 길이었다. 젊은 시절 의기충천하던 기개는 빛바랜 사진처럼 사그라졌고, 청 황실의 강압은 이 명대 유신(遺臣)의 심사를 더욱 암울하게 했다. 길 위에서 시인은 고향의 매화를 떠올린다. 눈앞의 눈보라와 대비되어 마음속 깊이 따스함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시인의 시선은 비록 앞을 향했지만 마음은 오래도록 매화 곁에 머물렀으리라. 고향 매화를 볼 수는 없지만 남쪽 가지에는 한창 고운 꽃빛이 피어나고 있을 터. 눈보라 속에서도 시인은 그 한 가닥의 기억을 품은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시인에게 매화는 자연의 한 조각이자 잃어버린 시간이면서 동시에 지키지 못한 마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꽃이 피는 남쪽 가지와 아직 찬 기운을 풍기는 북쪽 가지의 간극은, 두 왕조에 대해 시인이 느끼는 온도 차이기도 할 것이다. 이 은근한 비유는 아마 청 초엽 한족 선비가 자주 겪었던 필화(筆禍)를 의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백발#눈보라#장안#매화#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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