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앨라배마에서 생긴 일

  • 입력 2000년 8월 17일 17시 49분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

To Kill A Mocking Bird (1962)

감독: Alan Pakula

출연: Gregory Peck, Robert Duvall

원작: Harper Nell Lee

"잼 오빠가 팔을 심하게 다친 것은 열 네 살 때의 일이었다."

하퍼 넬 리( Harper Nelle Lee, 1924 -) 의 체험적 소설, '앵무새 죽이기'(1960)는 이렇게 어린 소녀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소설의 영상판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도 마찬가지다.

대공황으로 곤궁의 극치에 이른 1930년대 미국의 '극남(極南)지역'(Deep South) 앨라배마주의 소읍을 무대로 하여 미국사회 전체에 팽배한 인종적 편견을 고발한 작품이다. (미국의 법체계에서 앨라배마주가 차지하는 지위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6월 27일자 본 칼럼 '나의 사촌 비니'편 참조)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앨라배마는 미국사회의 축소판이다.

흔히 이 작품은 '인종문학'으로 분류된다. 무수한 '인종문학' 중에서 이 작품만큼 광범하고도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 작품도 드물다. 성공의 비결은 편견이 형성되기 이전의 동심을 매개체로 하여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호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더욱 빛난다. 세기의 명우, 그레고리 펙은 정겹고도 품위 있는 논리와 행동으로 동심을 감화시킨 공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버지 핀치는 시골 변호사이다. 중년에 맞은 열 다섯 살 연하의 아내가 남매를 낳고 결혼 6년만에 죽자 아버지는 혼자서 남매를 키운다. 비록 힘에 부쳐 격렬한 운동은 함께 해주지 못해도 세심하게 잠자리를 챙기고 어떤 질문에도 답을 피하지 않는다.

그의 육아사전에는 "몰라도 돼" "어른이 되면 알아" 등등 권위의 벽을 지키는 차단(遮斷)어는 없다. 그는 아이들을 아이가 아닌 단지 나이가 어린 성인으로 대하고 아이들이 제기하는 어떤 내용의 대화도 피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권위 대신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토론, 전쟁 대신 평화, 폭력 대신 설득의 시대가 왔음을 몸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씩 아이들은 혹시 아버지가 비겁한 사람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품는다. 아들 젬은 더욱더 그렇게 생각한다. 한 번은 나무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인다. 함께 풋불 놀이를 한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내려오지 않겠노라고.

친구와 치고 받으며 싸움질을 하는 딸도 폭력은 결코 안 된다는 아버지의 훈계가 뭔가 성에 차지 않는다. 어떤 경칭(敬稱)도 생략한 채 그저 애티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아버지이지만 절대로 울기만 할 뿐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는 앵무새를 쏘아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교육한다. 또 흑인, 심신장애자 등 타인에게 위험을 주지 않는 다른 '앵무새'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을에 '미친개 소동'이 난 후에 비로소 아이들은 아버지의 '앵무새' 철학을 신봉한다. 마을 보안관이 집을 찾아와 애티커스에게 미친개를 쏘아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는 안경을 돋우어가며 조준하여 단 한 발에 명중시킨다. 휘둥그래 놀란 아이들에게 보안관은 "네 아버지는 우리 마을 제 1의 명사수였단다"라고 말한다.

톰 로빈슨이라는 순진한 흑인청년이 백인처녀를 강간하려 시도한 혐의로 기소된다. 바람기 있는 처녀가 청년을 유혹하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들키자 부녀가 공모하여 로빈슨을 고소한 것이다. 핀치변호사는 마을 사람들의 빈축과 폭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톰을 변론하고, 뛰어난 변론으로 진실을 밝혀낸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이 사건을 맡지 않으면 마을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앵무새를 지키는 일에 나서지 않으면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재판에서 마엘라는 톰을 집안 잡일을 거들어 달라고 불렀는데 폭행 끝에 강간을 시도했다고 증언한다. 또한 아버지 봅 이웰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집에 돌아오는 순간 톰이 마엘라를 몸으로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빈슨의 증언은 다르다. 과거에도 마엘라가 수시로 자신에게 잡일을 부탁했고 그때마다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져서 들어주었다고 했다. 감히 흑인인 주제에 백인을 동정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도 그는 모른다.

사건이 터진 날도 마엘라가 자신의 손을 잡고 키스를 퍼부었고 이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온 것이다. 애티커스의 반대심문이 주효하여 이웰 부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강간을 시도하면서 로빈슨이 가한 폭행의 결과라는 마엘라의 뺨의 상처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왼손잡이의 소행일 수밖에 없고 로빈슨은 왼손이 불구라는 사실을 논증해 낸다.

그러나 백인만으로 구성된 배심은 감히 백인을 불쌍하게 여긴 방자한 흑인청년에게 즉시 유죄평결을 내리고 절망한 로빈슨은 도망치다 총에 맞아 죽는다. 애티커스가 불행한 소식을 톰의 가족에게 전할 때, 밥 이월이 나타나 모욕을 주고 얼굴에 침을 뱉는다.

원작과 영화의 3분의 1은 재판의 진행과정에 나타난 사람들의 심리상태와 사회 분위기를 묘사한다. 핀치의 말을 빌리면 "비열한 백인이 무지한 흑인을 파멸시키는 과정"이다. 이 작품은 편견과 원초적인 감정이 지배하는 세상에 합리적 이성의 덕목을 갖춘 개인의 진지한 노력을 강조한다. 비록 현실의 재판이 이성적 결과를 보장하지 않아도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론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진수는 인종문학의 범주를 넘어선다. 작품의 주제이기도 한 핀치의 '앵무새론'은 흑인 로빈슨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웃집의 '유령' 부 래들리 이야기라는 두 개의 플롯을 결합한다.

아이들의 의혹 속에 세상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자신의 집에 칩거하고 있는 부 래들리는 무언의 행위를 통해 아이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아이들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다. 이를 계기로 세상 속으로 돌아온다.

아버지 핀치는 참교육의 화신이다. 자녀 교육과 사회 정의의 문제를 동일한 비중으로, 그리고 동일한 원칙에 입각하여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한다. 불합리한 신분과 계급을 타파하기 위해 등장한 공교육이 오히려 흑백간의 계급의식을 조장할 때 그는 가정교육을 통해 이를 바로 잡는 것이다.

애티커스의 교육관은 법, 성인, 이성이라는 핵심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법은 사회적 이성이 되어야 하고 그 사회적 이성은 성숙한 성인의 균형 잡힌 사고와 행동에 기초한다. 진정한 용기는 내면의 것이기에 실제의 대결에서의 승패보다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죽기 전에 마약을 끊으려는 Duboise아주머니의 용기를 찬양하면서 그녀의 정원에서 꽃을 꺾어버린 아이들을 훈시한다. 로빈슨에게 변호인으로서의 최선을 다함으로써 'nigger lover'라는 폭언과 함께 물리적 위협에 직면하지만 조금도 비굴하지 않게 인내라는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도움 또한 기여했다.

코끝에 안경을 걸친 이 중년 서생은 자신의 도덕적 토대 위에 서서 승산 없는 전투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진정한 용기는 내면의 법, 정의 가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편견에 찬 백인대중을 당당하게 다루면서도 하층계급 흑인에 대한 연민의 정을 잃지 않는 그는 피부색을 초월한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로빈슨을 오로지 정의의 관점에서만 다룬다.

그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나서기 전에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친척들은 아이를 잘 못 키운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방법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 자신의 아이 교육이든 남부사회의 정의이든 동일한 비중으로, 동일한 원칙에 입각하여 처리한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불합리한 신분과 계급을 타파하기 위해 등장한 공교육이 오히려 흑백간의 계급의식을 조장할 때 그는 가정교육을 통해 이를 바로 잡는 것이다.

핀치의 교육방법은 지행일치(知行一致)(learning by doing)이다. 자신도 이러한 지행일치의 수련 과정을 통해 성장했다. 어린 시절 집에서 아버지한테서 배운 후에 주의 수도, 몽고메리(Montgomery)에서 "법을 배움" (read law)으로서 교육을 완성한 것이다. 변호사가 되어 메이컴에 정착한 그는 유능한 법률가이자 학식이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적재적소에서 고전의 구절도 인용하고 사람에 대한 균형 있는 평가도 내릴 줄 아는 교양과 이성의 화신이다.

소설에서는 공교육에 있어서도 교육방법의 혁신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도입부와 후반 군데군데에서 독자는 미스 캐롤린의 입을 통해 스카웃의 수업에 듀이의 '십진법' 교육법이 도입되고 있음과, 젬이 스카웃에게 "미스 캐롤린의 수업법은 결국 전교적으로 실시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읽는다. 그 요지는 "책에서는 배울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캐롤린이 주장하는 지행일치의 방법은 젬과 스카웃은 이미 실천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일고 토론함으로써 진정한 독해력을 배양한 것이다.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자 해독능력을 갖춘 스카웃에 당황한 캐롤린은 핀치 부녀의 교육방법을 비판했지만 따지고 보면 핀치의 교육방법은 곧바로 그녀가 시도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게이츠 선생은 민주주의와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가르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흑인이 "백인 꼭대기에 기어오를" 것을 두려워한다. 반면에 흑인식모 칼푸니아도 문맹이지만 진보적 교육의 실행자이다.

어린 스카웃에게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사물의 이치를 그녀의 수준에 맞게 가르쳐 준다. 아이들의 진정한 교육자는 캐롤린이나 게이츠 선생이 아니라 아버지, 칼푸니아, 그리고 알렉산드라 아주머니와 같이 생활 속에서 지혜를 터득한 이성적인 어른들이다.

작품의 결론부는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하여 남은 앵무새들, 즉 부 래들리와 아이들이 결합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밥 이웰이 밤늦게 학예회에서 돌아오는 젬과 스카웃을 공격한다. "유령인간" 부가 아이들을 구출하고 격투 끝에 이월을 죽인다. 로빈슨 사건에 관련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보안관은 이웰이 실수로 죽은 것이라고 공식보고서를 작성한다. 처음에는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던 애티커스는 마침내 보안관의 지혜에 수긍하기로 결론을 내린다.

벽촌교사, 섬진강 촌놈시인 김용택은 "기계도 종이도 숫자도 아닌 사람과 하루 종일 사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즐거움을 뽐냈다. (촌아 울지마, 2000) "아이들은 내 삶의 전부이고 명백하고 엄연한 내 현실이다."라고 말한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엡스키도 만년의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종장에서 러시아의 장래가 아이들에게 걸려 있음은 강조했다. 어른과 아이의 세계의 이성적 결합을 위한 참 교육"의 맛과 멋을 이 작품에서 만끽할 수 있다.

문학이 시대의 산물이고 문학작품이 사회적 텍스트라는 주장은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흔히 작자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알져져 있다. 작가 하퍼 리는 앨라배마 법대를 중퇴한 경력이 있다.

작품의 주인공 핀치변호사는 Monroeville이라는 작은 읍의 변호사였던 작가 자신의 아버지에서, 오빠 젬과 여름이면 찾아오는 특이한 성격의 친구 딜은, 후일 법률소설가로 성장하는 작가의 소꿉 친구, 트루만 카포티(Truman Capote,1924-84; '냉혈인간', In Cold Blood, 1966 등의 작가)가 모델이라고 한다.

작품 속에 그려진 법의 모습도 1930년대 앨라배마주 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핀치변호사가 로빈슨 사건을 맡게 된 것은 판사의 부탁에 의한 것이다. 판사로서는 당시의 법 아래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1932년 연방대법원은 소위 'Scottsboro Boys사건'으로 불리는 Powell v. State of Alabama 판결 (287 U. S. 45, 1932) 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기소된 극빈 형사피고인은 변호인의 효과적인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시했다. 소설 속의 로빈슨도 이 판결의 혜택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법정에서 흑인을 2층에 분리 수용하는 법정 장면도 당시의 상황에 충실하다. 흑인도 재판을 '방청(傍聽)'할 수는 있었지만 문자 그대로 소리 없이 옆에서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연방대법원은1880년의 판결에서 이미 흑인도 배심원이 될 수 있다고 판시했지만 (Strauder v. West Virginia, 100 U. S. 303, 1879) 실제로 흑인이 배심원이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앨라배마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빈슨이 죽은 후 애티커스는 항소심에서 승산이 있었다면서 안타까워했으나 죽은 자에 대한 아쉬운 조사에 불과할 뿐 객관적으로 성공률이 희박한 일이었다. 1심에서 유죄를 평결한 백인남성으로 구성된 배심이 자신들이 결정이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앨라바머 주의 항소심 판사가 이를 번복할 가능성은 소설 속에서도 몹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시대적 한계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심성은 어린이의 교육을 통해 배양되며, 그 보편적 심성은 오로지 합리적 이성에 기초해서만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설도 영화도 고전의 반열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서울대 법대 교수>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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