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홍지웅/출판대국이 '文化대국'

  • 입력 2000년 7월 19일 18시 43분


달포 전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내고 나서 나는 ‘과분한’ 혹은 다소 ‘과장된’ 평가를 받았다. 그러한 평가의 근거는 이렇다.

▼"청년시절 꿈 이뤄 행복"▼

요즘 같이 모든 사람이 인터넷이니 벤처니 주식이니 하면서 돈벌이에 혈안이 돼 있는 형국에 그 많은 제작비를 들여서 그것도 150여년 전 작가의 전집을 낸 것은 ‘바보짓’이자 ‘문화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청년 시절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20여년 뒤에 이루어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는 것이다.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경험이며 영광일 수 있겠다. 또한 ‘전집’을 낼 수 있는 여건이 된 것도 분명 나에게는 커다란 행운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왠지 씁쓸한 자괴감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10여년 전 러시아의 천재 영화감독 에이젠쉬체인의 책을 한 권 낸 적이 있다. 당시에 에이젠쉬체인 관련 자료를 수집하러 일본에 간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 출간된 자료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낱권으로 된 책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키네마준보사(Kinema旬報社)에서 1973년부터 간행된 10권짜리 ‘에이젠쉬체인 전집’은 러시아보다 20여년 앞서 발간된 전집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전집’을 낼 때도 마찬가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때에도 자료 수집차 런던에 있는 프로이트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박물관에는 프로이트가 생전에 모은 세계의 민속품들이 잘 보존돼 있었고, 환자들이 진료받을 때 썼던 그 유명한 ‘긴의자’도 있었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발간된 프로이트 연구서와 번역서 등 많은 책들이 진열 판매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영국의 호가스(Hogarth) 출판사와 정신분석학회에서 펴낸 스탠더드판 전집이 같은 시기에 나온 독일어판보다 내용도 훨씬 더 방대하고 해석이나 각주도 훨씬 알찬 전집이라는 사실이었다. 두 경우 모두 원본 전집보다도 오히려 번역판 전집이 훨씬 더 학문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전집 출간이 이 정도는 돼야 ‘사건’ 운운할 수 있을 터이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1930∼40년대에 고리키, 마르크스, 레닌 등이 쓴 대부분의 ‘고전’들의 전집이 간행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번역된 ‘마르크스’나 ‘레닌’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마르크스 이론의 유용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20세기의 가장 거대한 담론 가운데 하나인 마르크스를 우리는 그저 2차 자료만 가지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노변잡담을 늘어놓고서 21세기로 건너뛴 셈이다.

이런 출판 형태가 마르크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꼭 번역돼야 할 고전들이 정말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야 ‘제대로 번역된’ 판본을 갖게 된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번역사는 60년이 넘지만 지금까지 번역된 작품은 대부분 중역(重譯)된 것들이며 심지어는 최근에 번역된 단편소설들조차 여전히 마찬가지 구태를 벗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한국출판계 상업주의 젖어▼

작년에 일본의 한 출판사 사장이 우리 출판시장을 둘러보고 “한국 출판계는 지나친 엄숙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정말 엄숙하게 우리의 출판 수준과 출판 의식에 대해 고민해 보았는가? 그 보다도 그동안 우리는 너무 지나친 편의주의와 상업주의의 발상에 젖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본다.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문화 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미디어가 출판이다. 앞에서 든 사례들에서 보았듯이 일본이나 영국이 여전히 세계적인 수준의 출판 대국이 될 수 있는 배경에는 철저한 출판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출판계 전체가 전자책이나 인터넷 사업 쪽에 휩쓸려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문화적 토대로서의 출판의 본령’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할 것을 고언(苦言)한다면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까.

홍지웅(도서출판 열린책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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