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인 북]임석재/'공간의 정치경제학'

  • 입력 2000년 7월 1일 00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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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정치경제학' 한국공간환경학회 지음/아카넷 펴냄▼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매일을 살아가는 서울 같은 현대 대도시에 자본주의의 음모가 숨어있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에서 음모란 특정 개인에 의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보다는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에게 서로서로 거는 음모다. 그 음모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몇 초를 못 기다리고 빵빵대다가 차에서 내리면 반대로 빨간 불인데도 막 건너가는 조급증 같은 것이 이 음모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빨간 불이면 못 건너간다는 규칙조차도 자본주의의 음모라는 것이다.

이런 음모의 끝은 생산성 향상에 맞추어진다. 도시 전체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기계 덩어리이며 이 기계는 매우 정밀하게 톱니가 맞아떨어지며 돌아간다. 각 개인은 정신과 넋을 내주며 기계의 부속품으로 매일을 살아간다. 세 끼 배불리 먹고 여기에 더하여 약간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번다는 것이 이런 대도시 생활을 무마해주는 자본주의의 선물이다. 대도시에 살면서 누구나 느끼는 묘한 불쾌감은 사실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생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눈만 뜨면 공기처럼 혹은 내 몸의 일부처럼 늘 붙어 다니는 정체 불명의 매스꺼움(nausea) 같은 것 말이다.

서구 선진국의 현자들은 이미 100년 전에 자본주의 대도시의 이런 문제들을 날카롭게 짚어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초기 근대 대도시의 골격을 구성하는 많은 구조물들이 사실은 상업주의를 부추기는 ‘넝마’들임을 경고하였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음모가 더욱 교묘해짐에 비례하여 그 이중성을 파헤치려는 현자들의 노력 또한 그만큼 치열해지고 있다. 도시와 건축 공간 속에 복잡하게 얽힌 음모 구도를 밝히는 작업은 이런 노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일명 ‘공간의 정치경제학’이다.

이 분야는 매우 광범위하고 학문적 경계가 뚜렷하지는 않다. 도시 및 지역의 효율적인 개발을 위한 경제 정책학적 측면도 이 분야의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의 거의 모든 중요한 사상가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분야의 매력은 현대 대도시가 가져온 인간성 상실에 대한 분석과 대안 제시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체제 문제보다 상위에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545쪽, 2만5000원.

임석재(이화여대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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