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정선의 '금강전도'

  • 입력 2000년 6월 20일 19시 00분


새해를 앞두고 정선은 ‘금강전도’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대작에 걸맞는 제시(題詩)를 썼다.

‘만 이천 봉 겨울 금강산의 드러난 뼈를/뉘라서 뜻을 써서 그 참 모습 그려내리/뭇 향기는 동해 끝의 해 솟는 나무까지 떠 날리고/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 누리에 서렸구나/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 양 흰빛을 드날리고/반쪽 숲엔 소나무 잣나무가 현묘(玄妙)한 도(道)의 문(門)을 가렸어라/설령 내 발로 밟아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그 어찌 베갯맡에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요!’

제시를 보니 산 위쪽 푸르스름한 바림은 하늘빛이 아니라 명산이 뿜어내는 향기다. 그런데 자신의 그림을 가리켜 감히 금강산보다 낫다고 한 뜻이 무엇인가? 또 무슨 속 깊은 ‘뜻을 써서’ 작품을 그렸다는 것인가?

그렇다! 과연 큰 뜻이 숨어 있다. 정선은 우선 ‘주역(周易)’의 대가답게 호기롭게도 금강산 뭇 봉우리를 원으로 묶어버렸다. 그리고 반씩 쪼개어 태극을 빚어냈다. 맨 아래 짙은 장경봉(1)에서 중앙 만폭동(2)을 지나 소향로봉(3), 대향로봉(4)을 거쳐 비로봉(5)까지 이어진 S자 곡선, 이것은 바로 태극이 아닌가. 태극은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을 뜻한다. 동시에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첫걸음이다. 음양은 원래 상반되지만 태극으로 맞물리면 서로가 서로를 낳고 의지하며 조화를 이룬다.

정선은 우뚝 솟은 비로봉과 뻥 뚫린 무지개 다리(6)로 거듭 음양을 강조하였다. 그 다음 이번에는 심오한 오행(五行)의 뜻을 심었으니, 만폭동(2)에선 든든한 너럭바위(土)를 강조하고, 아래 계곡(6)에는 넘쳐나는 물(水)을 그렸다. 그 오른편 봉우리(7)는 촛불(火)처럼 휘어졌고, 중향성(8) 꼭대기는 창검(金)을 꽂은 듯 삼엄하다. 끝으로 왼편 흙산(9)에 검푸른 숲(木)이 있다.

이러한 오행의 배열은 선천(先天)이 아닌 후천(後天)의 형상이다. 정선은 금강산을 소재로 겨레의 행복한 미래, 평화로운 이상향의 꿈을 기린 것이다.

음양에는 건순(健順)의 덕, 수화목금토 오행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이 있다. 군자는 음양오행을 본받아 굳셀 때 지극히 굳세지만 부드러울 때는 한없이 부드럽다. 또 봄볕처럼 자애롭고(仁), 가을 하늘처럼 의로우며(義), 초목이 여름에 무성해도 질서가 있듯이 예를 지키고(禮), 흙에 묻혀 겨울을 나는 씨앗처럼 지혜롭다(智).

그리고 중심에 늘 변치 않는 믿음이 있다(信). 제시를 쓴 방식도 절묘한데, 가운데 1행이 ‘사이 간(間)’ 자다(10). 이것은 두 문짝 틈새로 비치는 햇빛이니,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온다. 그 좌우 2행은 두 글자씩이요, 다시 바깥 4행은 네 글자씩이다. 태극의 첫걸음은 1→2→4로 끝없이 펼쳐져 뻗어나간다.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 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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