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벽초 홍명희

  • 입력 2000년 6월 13일 19시 17분


조선시대 선비들은 늙고 병들어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껴지면 자식들로 하여금 ‘고종록(考終錄)’을 쓰도록 했다. 병석에 눕고 난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극심한 고통과 공포는 선비로서 평생 쌓아 온 자존심을 단숨에 허물어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를 두려워한 선비들은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게 함으로써 보다 의연하게 죽음을 맞으려 했던 것이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선비의 길’을 걸으려 했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는 풍산 홍씨의 명문 사대부가(家) 후손이다. 그는 파란만장했던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았으면서도 사대부 출신으로서 선비 정신에 누구보다 투철했다. 3·1운동 때 고향인 충북 괴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에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킨 강직한 인물이다. 부친 홍범식도 1910년 경술국치를 맞자 자결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벽초는 “선비의 지조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질지언정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올곧은 태도는 때로는 결벽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임꺽정’ 이외에 다른 소설을 일절 쓰지 않았는데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꼽혔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의외로 유약한 일면이었다.

▷그는 해방후 월북해 북한 부수상을 지낸 탓에 그를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에 속했다. 월북작가 해금 조치가 이뤄지고 98년 괴산에 그를 기리는 문학비까지 세워졌으나 앙금은 남아 있는 듯하다. 보훈단체들이 ‘민족해방운동의 큰 봉우리’ 등의 비문 내용에 이의를 제기해 현재 비문이 철거된 상태다. 최근 양측이 타협을 통해 월북 활동을 명시하는 것을 포함한 새 비문을 만들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홍명희가 걸었던 길은 선비로서,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다. ‘열린 마음’은 두 정상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