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영/市場이 정부를 믿으려면

  • 입력 2000년 5월 16일 19시 12분


한국의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는 질책이 국내외에서 무성하다.

정부나 공기업 부문이 솔선수범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업들의 개혁도 아직은 모자란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무엇보다 2차 금융구조조정의 불투명성이 해외투자자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헌재재정경제부장관을 비롯한 실무 책임자들에게 개혁피로증후군이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2년간 금융구조조정을 이끌어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면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뿐일까.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개혁피로증후군이 특정인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된다. 오히려 사회 전체가 개혁피로증후군을 느끼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예컨대 몇몇 은행은 현재의 상태로 연명해봤자 부실만 키우는 꼴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경우 시장기능에 따라 우량은행에 합병되는 자발적 구조조정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런 일을 기대하기 힘들다. 은행들이 정부의 눈치만 살피는데다 노조의 반발도 감안해야 한다.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지나갔다는 인식 때문에 구성원들의 인내심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고 시장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도 망설인다. 1차 금융구조조정을 통해 수많은 충격과 반발을 경험해 같은 일을 하기가 두려운데다 ‘관치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도 있다. 외국에 매각이라도 하는 날이면 야당으로부터 ‘국부를 싸구려에 유출했다’는 비난을 또다시 받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때에 국민을 설득하면서 끌고 가야 할 경제팀의 최근 불협화음은 정말 우려되는 ‘개혁피로증후군’의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이 불협화음은 상당 부분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선 직전 야당이 정치공세로 ‘국가부채 규모’ 문제를 제기하자 김대중대통령은 “행정부가 국민의 오해를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다”고 이헌재장관을 질타했다. 그리고 이 질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시장에 ‘미묘한’ 파장을 던졌다.

첫째, 금감위원장 시절부터 금융구조조정을 지휘하면서 쌓아온 이장관의 카리스마에 대해 시장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장관은 그동안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리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시장 흐름을 선도해 왔다. 그런데 대통령의 질책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말이 시장에서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둘째, 정부 내 잠재적 경쟁자들을 포함한 반대파의 ‘이헌재 흔들기’가 본격화됐다. 당연히 외부에는 경제팀의 불협화음으로 비쳤다. 그리고 이런 불협화음은 시장이 이장관의 말을 더욱 믿지 못하도록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정책 책임자들이 같은 사안에 대해 다른 말을 하면서 시장은 더욱 혼란에 빠져든 게 최근의 양상이다. 요즘 경제정책이 혼선을 빚는다고 비판받는 문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 시점에서 시장의 혼란을 제거하려면 대통령이 경제팀을 신뢰한다는 사인을 시장에 보낼 필요가 있다. 팀워크 회복을 위해 경제팀을 새로 짤 수도 있고 현재의 경제팀에 다시 무게를 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경제팀의 수장이 자리에 앉은 채 흔들리는 일이 지속돼서는 시장이 정부를 믿고 따를 수 없다.

김상영<경제부 차장>young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