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명재/벼락공부式 한국경제

  • 입력 2000년 5월 11일 21시 55분


외국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의 수가 크게 늘면서, 그리고 경제성장률이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덩달아 한국인들의 기억력도 자꾸 떨어지는 것 같다.

미국 워싱턴 등에서 만난 한국 경제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은 불과 2, 3년 전 어려웠을 때의 일을 벌써 잊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들 말한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일하는 한 한국인도 “IMF 관계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대하는 한국 관리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뻣뻣해졌다는 말이 나돈다”고 전했다.

이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한국인은 당장 ‘급한 불’을 끄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그걸 지키는 것에는 익숙지 못한 체질인 듯싶다.

가령 우리의 미국 내 인적 네트워크가 튼튼하지 못한 것도 그런 ‘벼락공부’ 버릇 탓은 아닐까. 통상현안 등이 있을 때 우리 입장을 대변해주는 미국 내 인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걸 키우려면 평소 꾸준히 공을 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인은 불이 나면 급히 달려오지만 평소에는 잘 볼 수가 없다”는 말을 듣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방미 통상외교를 벌이고 있는 김영호(金泳鎬)산업자원부장관의 행보를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장관이 샬린 바셰프스키 미 무역대표부 대표와 윌리엄 데일리 상무장관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만류했다. 지금은 한미간에 별 통상마찰 없이 조용한 편인데 괜히 ‘긁어 부스럼’이라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괜한 부스럼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정을 잘 모르는’ 교수출신 장관의 공격적인 자세는 미국측 파트너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후문이다. 설사 지금은 잔잔한 물에 파문을 일으킬지라도 나중엔 배를 움직이는 파도가 될 수 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국가전략도 평소 건강에 방심하다 급한 병이 나면 허둥대는 식은 안된다. ‘맑은 날 우산을 준비하는’ 마라톤 레이스를 펼쳐야 한다. 이명재기자<경제부>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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