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우스운 죄 웃기는 벌

  • 입력 2000년 4월 19일 19시 20분


며칠 전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제목의 책(서대숙 지음)이 소개되었다. 그들 부자(父子)를 이제 ‘지도자’라고 써도 되는구나? 세월의 변화를 실감한다. 32년 전만 해도 제목도 아닌 본문에 ‘빨치산운동의 지도자 김일성’이라는 표현이 실렸다 해서 필화소동이 났던 것이다. 신동아가 영어 논문의 ‘리더’를 그렇게 번역해 실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공비(共匪)의 두목’이 왜 지도자냐며 트집, 편집자를 구속했던 것이다.

▷작가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은 50년대말 실향민 일가의 비참한 일상을 그린 명작이다. 요즘으로 치면 영화 ‘박하사탕’만큼이나 우울하고 암담한 잿빛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냈다. 어머니는 고향을 그리며 밤이나 낮이나 “가자 가자! 삼팔선에 담이 있다는 말이냐”라고 외친다. 그리고 창녀가 된 여동생, 권총강도가 된 남동생, 죽어 가는 아내… 이 음울한 분위기의 작품 때문에 작가는 교직에서 쫓겨나 해직교사 1호로 기록됐다. 당국은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흥분했다던가?

▷6월의 남북정상회담 발표에 이어 ‘면회소 설치’ 같은 보도가 나온다. 판문점에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도록 면회소를 만들자는 이 아이디어는 64년 국회에서 이만섭의원이 처음 낸 것이다. 일본에서 북한 육상선수 신금단과 남한의 그녀 아버지가 상봉, 온 국민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 사건에서 착안했다. 그런데 정보부는 이의원이 반공법을 어긴 것이라며 구속하려 들었다. 결국 대통령이 거들어 이의원은 구속을 피하긴 했지만.

▷‘남북한이 불가침 약속을 하고 군비(軍備)축소를 해야 한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제3국을 통한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 지금은 누가 주장해도 문제가 안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64년 ‘세대’잡지에 당시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씨가 그런 글을 냈다가 구속 처벌되었다. 이제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는 시대니 그런 난센스는 되풀이되지 않겠지. 냉전시대, 우리는 너무 우스운 유산을 많이 남긴 것만 같다. 역사를 내다보고 비약하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역사가 비웃을 일들만은 안 해야 할 텐데.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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