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초석만 놓으시지요

  • 입력 2000년 4월 14일 19시 42분


투표일 사흘 전 발표된 남북정상회담합의는 수도권과 강원지역에서는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전국적으로는 약효가 별게 아니었던 것 같다. 전국단위의 대통령선거가 아닌 총선거에서는 아무래도 인물 중심의 선택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민족적 이슈라 하더라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정상회담의 의미가 가벼워질 수는 없다. ‘신북풍(新北風)’정도로 깎아내릴 일은결코 아니다. 분단 반세기만에 남북정상이 만난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전세계 언론이 일시에 머릿기사로 다룰 만한 세계사적 사건과 4년 전 4·11총선 직전의 ‘북풍’을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민주당 김한길대변인의 논평은 옳다.

4년 전이나 이번이나 북한의 움직임이 선거 직전에 있었다는 것은 같지만 그 성격은 정반대다. 4년 전 북풍은 위기와 긴장을 조성했던 것인데 비해 이번은 기대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너무나도 ‘큰 작품’▼

물론 정상회담에 관한 정부 발표에는 문제점이 있다. 우선 총선 사흘 전이라는 발표시기에서부터 너무 서두른 듯 합의문이 엉성하다는 것, 교섭과정 이면에서 뭔가 상당한 양보가 이뤄지지 않았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짚어봐야 할 것들이다.

이렇게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총선 직전이라 하더라도 남북합의의 의미를 그 본질적 가치는 애써 외면한 채 오직 선거전략적인 면에서만 코멘트, ‘신북풍’ 또는 ‘총선용 깜짝쇼’라며 부정적으로만 본 야당의 태도는 옹졸하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발표한 것은 남북문제를 선거에 이용하려한 것 아니냐는 비난에 대해 박태준(朴泰俊)총리가 보여 준 솔직한 태도는 차라리 당당해 보인다. 박총리는 12일 총리공관에서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정상회담에 관해 설명하면서 북측이 제의한 ‘총선 전 발표’를 수용한 것은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고려도 한 원인이라고 털어놨다. 어느 정치세력이건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은 그렇게 이용하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멋진 작품’이다.

‘총선 전 발표’와 관련해 일부 전문가들은 주목할 만한 지적을 한다. 북한은 남쪽정권을 봐주기 위해, 이왕 합의해주는 것이라면 크게 한 번 봐주는 게 앞으로 더 큰 것을 받아내는데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총선 전 발표를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남한의 정치상황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회담일정이나 의제 등을 정하는데도 여러 가지 계산을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했더라면 북측이 총선 전 발표를 제의했더라도 그것을 거절하는 게 옳았다는 지적이다.

▼‘초당적 논의 틀’ 필요▼

여하튼 남북간의 역사적 합의는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알찬 결실을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야를 초월한 협조와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는 ‘초당적 논의의 틀’을 갖출 필요가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평양에 가기 전 이 틀에서 회담의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현 정권에 이어 다음 정권에까지 일관성 있게 계속되기 위해서라도 정권을 초월한 ‘논의의 틀’이 마련돼야 한다. 이 논의과정에서 김대통령은 특히 의회를 존중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국민과 직접 대화한다는 명분 아래 국회를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야당도 반대할 것은 분명히 반대해야 하지만 지지할 것은 확실하게 지원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줘야 수권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

김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 남북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위한 초석을 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남북관계 발전의 기초단계인 교류협력 평화공존이라는 레일만 제대로 깔아놓으면 된다. 그다음 단계의 일은 다음 사람이 이어받으면 된다.

50년 만에 실질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통령은 남북정상의 첫번째 회담을 성공적으로 해내 이 땅에서 전쟁의 공포를 거둬내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김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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