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소비자파워]물건 사기전에 소비자잡지 펼친다

  • 입력 2000년 1월 18일 20시 23분


자동차 TV 어린이장난감 등 내구재나 안전에 신경을 써야하는 상품을 사려면 어디에서 상품정보를 구해야할까.

각종 마케팅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소비자 대부분은 친구 직장동료 등 믿을만한 사람들로부터 ‘입소문’을 통해 정보를 얻거나 광고에 의존, 상품을 구입한다.

그러나 입소문은 한계가 있는 법. 이럴 때 모든 상품의 질을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해주고 가격까지 조사해놓은 ‘정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진국에서는 이런 소비자의 욕구가 이미 충족된지 오래다.

지난해말 미국 로스앤젤레스시 K마트 매장. 입구에 설치된 신문잡지코너에서 수전 애틀턴(64)이 열심히 한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잡지의 이름은 ‘컨슈머(소비자) 리포트’.

“저뿐만이 아니라 미국인들은 물건을 사기 전에 ‘컨슈머 리포트’를 사보는게 습관이지요. 이 잡지만큼 상품의 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주는 정보지도 없답니다.”

미국 소비자들의 이런 굳건한 믿음 덕분에 한 권에 4000원 가량 하는 이 잡지는 1년에 470만부가 팔려 나가며 수많은 상업잡지가 경쟁하는 미국에서도 잘 팔리는 10대 잡지 중 하나로 꼽힌다.

기자도 이 잡지를 한번 펼쳐보았다. 67쪽인 1999년 11월호에는 광고 한 건 없이 우편주문 옷, 연말용 각종 선물, 커피기계, 카메라, 겨울용 타이어, 트럭, 각종 와인 등의 제품에 대해 가격은 물론 특징과 단점 등이 자세히 묘사돼 있었다. 해당분야 내의 순위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그 가운데 20종류의 와인을 평가한 항목에는 와인별로 점수가 기재돼 있는데 가격이 비싸다고 꼭 순위가 높은 것은 아니다. 28달러짜리 와인이 115달러짜리보다 후한 점수를 받기도 했다. ‘향기가 부족하다’ ‘고급품이라는 광고에 품질이 못미친다’는 식으로 평가문구도 직설적이고 가혹한 편이다. 애매한 표현을 피하려는 노력이 피부로 느껴진다.

도대체 누가 이 잡지를 만들기에 이처럼 자신있게 어떤 상품이 좋고 어떤 상품은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뉴욕시에서 차로 40분 가량 걸리는 뉴욕주 용커스시. 컨슈머 리포트지를 발행하는 미국의 최대 소비자단체 컨슈머 유니온(Consumer Union·CU)을 찾았다. CU는 직접 소비자관련 활동을 하는 부서와 컨슈머 리포트지를 만들어내는 부서로 나누어져 있다.

CU관계자들은 공정하면서도 기업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정보를 만들어내는 비결로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일체의 기부를 받지 않고 광고도 싣지 않는데서 오는 독립성 △자동차 성능검사를 할 수 있도록 트랙까지 포함된 각종 테스트 장비와 50여개의 실험실, 그리고 해당 연구인력 및 검사의 철저함을 꼽는다.

컨슈머리포트지에 실리는 상품정보의 신뢰성은 1936년 이 잡지가 창간된 이래 64년간 기업측이 자사 제품에 대한 평가내용에 이의를 제기한 일이 9번에 불과 한데서도 알 수 있다. 9번의 소송도 모두 컨슈머리포트측이 승소했다.

이 잡지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두텁다보니 이 잡지에 실린 상품평가는 기업의 사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컨슈머리포트가 90년대 초반 스즈키 사무라이라는 트럭의 안전성에 문제를 제기하자 즉각 판매량이 60% 떨어졌고 한 이름없는 의류업체가 만든 옷의 품질이 좋다고 보도되자 판매량이 50% 늘 정도.

CU는 또 청소년 대상의 잡지 ‘질리온’과 여행상품만을 평가하는 ‘여행소식(Travel Letter)’을 별도로 발간하는데 이 잡지들 역시 각각 수십만부가 팔리고 있다. 이밖에 집 중고차 금융상품 등 가격이 비싸거나 소비자가 특별히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는 상품에 대해서는 아예 관련정보를 묶어 책자로 펴내고 있다.

이처럼 소비자에게 바른 정보를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소비자단체뿐만이 아니다. 정부의 노력도 이에 못지않다.

미국의 교통부는 매년 미국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자동차를 검사해 이들의 안전성 편리성 등을 평가해 발표한다. 여기서 좋지 않은 점수를 얻은 차는 미국시장에서 판매를 사실상 포기해야 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소비자에게 올바른 정보를 알리는 활동은 유럽도 활발하다. 파리시 구에노 거리에 있는 소비자잡지 ‘크 슈아지(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펴내는 소비자연맹(UFC). 지난해 말 기자가 이 곳을 찾았을 때는 마침 다음호 제작을 위한 아이템회의가 진행중이었다. 우리 소비자단체들에는 주로 여성회원과 직원들이 많은 데 반해 전문성을 갖춘 남자직원들이 많은 것이 우선 눈에 띄었다.

니콜러스 라마냑 UFC 소비자보호국장은 “크 슈아지가 매달 23만부 정도 팔린다”며 “최근에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공공서비스에 초점을 맞춰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잡지는 각종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사기성 또는 부정확성 여부를 따지는 각종 조사 △품질 안정성 편리성 가격 등이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비교테스트 등을 상세히 싣고 있다.

크 슈아지가 제기한 문제는 항상 프랑스 소비자로부터 큰 반향을 이끌어 냈다. 1963년 이미 방사선 조사(照射)식품의 문제점을 제기했고 수질오염, 신용카드 부정사용, 양로원 비리, 성장 호르몬의 부작용 등의 문제를 줄기차게 폭로해 왔다.

이밖에도 프랑스에서는 우리나라의 ‘소비자보호원’과 똑같은 뜻의 INC라는 기관이 한 부에 5000원 가량 하는 ‘6000만 소비자’라는 잡지를 매달 20여만부 발간한다. 그만큼 소비자정보지가 다양화돼 있다는 뜻.

영국에도 소비자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소비자 정보지 ‘WHICH’가 있다. 영국의 소비자협회가 1957년부터 매달 발행하는 이 잡지는 영국 소비자들이 접하는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비교정보를 제공하며 50여만명의 소비자가 이 잡지를 매달 구독하고 있다(1년 구독료 12만원).

삼성전자의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가 이 잡지의 평가에서 후한 점수를 받아 영국시장에서의 판매신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 WHICH의 평가는 해당기업의 주가도 좌우한다.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송보경(宋寶炅)회장은 “소비자에게 필요한 객관적인 상품정보가 없는 상태는 소비자의 권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뉴욕 에너하임=이병기기자·파리=정성희기자>watchdog@donga.com

▼한국은…▼

한국에도 물론 상품정보를 소비자에게 알리는 잡지가 있다.

소비자보호원이 매달 발행하는 ‘소비자 시대’가 그것. 민간단체들이 정보지를 발행하는 미국 영국 등과 달리 정부기관이 정보지를 발행하는 프랑스 일본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소보원이 1988년11월부터 매달 발행하는 이 잡지의 구독자는 2만명에 불과하다(한달 구독료 2000원).

선진국에서는 소비자정보지의 구독자가 수십만명에 달하는데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외면당하는 걸까.

“한국 소비자는 상품을 살 때 정보를 구하지 않을 뿐더러 정보를 얻는 데에 돈을 쓰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소보원 신동구(申東玖)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 사무처장의 설명이다. 아직 합리적인 소비행태가 습관화돼 있지 않다는 뜻이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여정성(余禎星)교수의 진단은 다르다. 국내 상품들이 대부분 독과점으로 생산되고 수입상품도 별로 없어 소비자가 자세한 상품정보를 취득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 소비자단체들은 “소보원이 기업이 공개하기 꺼리는 정보를 싣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 시대’에 대한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다”며 “소보원이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는 객관적인 비교정보를 싣는다면 구독자가 늘지 않을 리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떻든 소보원 자체에 상품을 객관적으로 비교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의지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약점이다.

잡지내용의 90% 이상이 각 상품의 질이나 가격비교로 채워진 선진국의 소비자정보지와 달리 ‘소비자 시대’는 상품비교 정보가 전체의 25%밖에 되지 않는다.

잡지제작 인력도 5명에 불과하다. 또 예산부족으로 자동차처럼 값비싼 품목을 분석할 장비구입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외부기관의 장비를 적극 활용할 의지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병기기자>watchdog@donga.com

▼스웨덴은…▼

스웨덴 스톡홀름 북쪽 태비지역에 사는 교민 정혜영씨(36·회사원)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조간신문 ‘다겐스 니에테르’를 펼쳐본다.

A섹션의 1면을 대강 훑어본 다음 신문을 뒤집어 맨 뒤쪽의 소비자 페이지를 꼼꼼히 읽기 시작한다. 2세, 4세 형제를 둔 정씨에게 매일 상품정보에서부터 물가변동까지 폭넓은 정보를 주는 이 페이지는 소비생활의 ‘지침서’역할을 톡톡히 한다.

스웨덴 소비자들은 주로 신문과 광고전단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광고전단은 판단에 혼란을 주는 일도 있기 때문에 신문을 훨씬 신뢰한다.

발행부수 40만을 자랑하는 스웨덴 최대 일간지 ‘다겐스 니에테르’의 기자 수는 300명. 그중 20여명이 소비자부에서 일하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지난해 말 소비자부 기자 4명이 편집국 한가운데서 가위로 겨울부츠를 싹둑싹둑 잘라보고 있었다.

북구의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부츠는 당연히 소비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품목. 며칠전에는 오리털 파커를 다뤘는데 기자들이 직접 소재와 가격을 조사하고 외부 실험실에서 열차단지수를 측정한 뒤 게재했다.

이처럼 독자들의 관심이 높은 상품이나 서비스는 거의 예외없이 다뤄진다. 수요일엔 노인층을 위한 페이지로 보험정보에서부터 인터넷 사용법, 박물관입장료, 의약품, 실버타운 정보 등을, 일요일자 ‘젊은이를 위한 소비자페이지’는 대학생 대상의 융자금과 한달 생활비, 회사별 이동전화비 등을 다루고 있다. ‘소비자의 천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국립소비자청에서도 끊임없이 상품 및 물가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굳이 신문사가 나서는 이유가 궁금했다.

소비자부 쉘 뢰프베리 기자는 “소비자가 원하기 때문”이라며 “소비자들이 아무래도 관료적인 국가기관보다 신문을 가깝게 느낀다”고 설명했다. 평가방법도 공정해 생산업체들도 결과에 수긍하는 편이라고 한다.

<스톡홀름=김진경기자>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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