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오세정/연구개발 집중화 지나치다

  • 입력 2000년 1월 17일 20시 06분


21세기 무한경쟁 시대에 대비해 선진국이나 후진국 모두 국가과학기술 능력 배양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다행히 한국도 국정 책임자의 인식이 확고하며 국민 의식도 호의적인 편이다. 새해 예산에서 연구개발비는 전체 예산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과학기술력의 향상은 돈이나 대통령의 지시 하나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을 짜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행정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 세금인 국가연구개발투자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 정부의 연구개발지원 방향에 큰 문제점이 있다.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정책은 한정된 재원을 사용해 중점육성과 저변확대의 균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연구개발투자의 규모가 작고 연구인력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일부 유망분야와 연구진을 선택해 집중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분명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 중점 육성 대상에 끼지 못한 분야들을 고사시키거나 같은 분야에서도 소위 ‘유행에 맞지 않은’ 연구자들이 도태된다면 국가 전체의 과학기술 능력에 커다란 손실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매우 복합적이어서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협조가 필수 불가결하며, 또한 과학기술의 특성상 항상 커다란 발견 발명은 계획되기보다 의외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선진국에서는 중점 육성 못지않게 전체적인 과학기술 기반조성과 저변확대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정부의 연구개발 정책은 지나치게 집중화 대형화로 치우치고 있다. 교육부의 ‘두뇌한국(BK)21’사업, 과학기술부의 ‘국가중점연구실’과 ‘21세기 프런티어’사업 등은 모두 대규모 투자나 사업단의 구성을 필요로 한다. 이를 보완할 개인 연구자나 신진 연구자를 위한 저변확대 프로그램은 없다. 특히 ‘21세기 프런티어’사업은 과제당 매년 100억원, 10년 간의 투자를 예상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과연 한국의 연구개발 규모로 이같은 대규모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기획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과학 칼럼니스트인 프리만 다이슨 교수는 지나치게 규모가 큰 연구개발사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가지 들고 있다. 첫째, 실패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사업이 보수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필수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력이 발휘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치 첨단기술개발에는 대규모 재벌기업보다 소규모 벤처기업이 더 적합한 것과 같다. 획기적인 연구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대규모 사업단 하나보다 소규모의 연구집단을 여럿 지원해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대규모 사업은 추진이나 책임자 선정과정에서 정치적인 고려가 들어가기 쉽다. 최근 과제책임자 선정에 여러 잡음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흔히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연구개발사업의 성공적인 모델로 일본을 든다. 반도체 공작기계 등에서 일본의 산업기술이 단기간에 경이적인 성장을 한 이유는 정부가 유망업종을 선정하고 공동연구개발을 집중 지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경영학자 마이클 포터 교수는 최근의 논문에서 항공기와 소프트웨어 산업 등 일본의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분야에서도 정부가 주도하는 집중적인 연구개발지원이 있었다는 사례를 제시했다. 지식기반사회로 가면서 덩치 큰 대기업보다 중소규모 벤처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는데 한국의 연구개발정책은 오히려 대규모 사업단 위주의 집중형으로 가고 있다. 미래 기술에 대한 뚜렷한 비전 없이 빛 바랜 패러다임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오세정(서울대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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