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국가고시 진단]엉터리문제로 불신만 쌓여

  • 입력 2000년 1월 16일 20시 03분


국가의 인재를 선발하는 사법시험 등 국가시험이 총체적 불신을 받고 있다.

사법시험 1차 시험의 오류를 지적하는 소송과 이를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잇따르자 행정자치부는 ‘문제검토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제도 개편에 나서고 있으나 구조적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국가시험 관리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 총체적 불신을 낳고 있다”며 “근본적인 인식 전환 없이 제도적 개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태”라고 진단하고 있다.

▽정답 없는 국가시험=서울행정법원은 14일 “99년도 41회 1차 시험 중 2개 문제의 정답이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민법 문제 1개는 정답이 2개고 형법 문제 1개는 정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행자부가 채점 도중 헌법과 지적재산권법 등에서 4개 문제의 오류를 발견하고 정답을 정정한 사실도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재판부 관계자는 “그 4개 문제 중 2개 문제는 정답이 없어 모두 맞은 것으로 채점됐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국가시험인 사시에 아예 정답이 없는 3개 문제를 포함, 6개 문제가 잘못 출제된 것이다.

◆고작 7000원들여 1문제 만들어

이 소송을 대리한 이재화(李在華)변호사는 “항소심에서 문제 오류가 추가 확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1심 재판부의 판사도 “다툼의 여지가 있는 문항이 더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98년도 40회 1차시험에서도 총 7개 문제의 오류가 확인됐다. 이중 4개 문제는 대법원 판결로 그 잘못이 확정됐으며 2개 문제는 행자부의 채점과정에서 밝혀졌다. 나머지 1개 문제는 대법원 계류 중.

현재까지 드러난 40, 41회 1차 문제의 오류만 무려 13개인 셈이다.

고시전문학원인 한림법학원 이원무(李園懋)부장은 “국가시험은 평균 경쟁률이 100대1에 육박하기 때문에 1, 2개 문제 차이로 수백∼수천명의 당락과 운명이 뒤바뀐다”고 말했다.

▽불신 낳은 부실출제=대학교수가 행자부 문제은행에 1개 문제를 넣고 받는 돈은 7000∼8000원. 사설 고시학원은 모의고사 1개 문제에 3만원 이상을 지불하는 것과 비교하면 황당한 액수다.

구조적으로 행자부 문제은행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고 출제교수들은 말한다.

서울대 법과대의 한 교수는 “‘문제 오류를 지적하는 소송과 판결이 더 많아져야 출제 수당도 많아지고, 따라서 문제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는 뼈있는 농담이 교수사회에 나돌 정도”라고 말했다.

과목당 3명의 문제선정위원이 이처럼 ‘문제’있는 문제은행에서 시험문제 40문항을 골라 검증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불과 5, 6시간. 행자부는 “연간 국가시험에 동원되는 선정위원이 1000명이 넘어 숙식까지 제공하며 검토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美선 1년간 연구검증후 출제

미국변호사 이찬형(李贊炯)씨는 “미국 변호사 시험의 경우, 시험 전문기관에서 1년 내내 연구하고 검증된 문제가 출제되기 때문에 불신이 생겨날 소지가 없다”고 말했다.

▽인식의 대전환 절실=행자부는 지난해 9월 사법시험 사상 최초로 40회 1차 불합격자 527명을 추가 합격시켰다. 4개 문제의 오류가 대법원에서 확정됐기 때문. 41회 1차 2문제의 오류가 드러난 이상 41회의 ‘억울한’ 탈락자에 대해서도 비슷한 조치가 내릴 수밖에 없다.

‘부실 출제→정답 시비 소송과 판결→탈락자 구제’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어도 행자부측은 현실적인 제약만 거론할 뿐 개선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것.

서울행정법원 구욱서(具旭書)부장판사는 “국가시험은 국민의 재산과 안녕을 지키는 공무원을 뽑는 중요한 절차”라며 “완벽한 검증을 거친 문제가 출제될 수 있도록 모든 조치가 강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는 40회 1차 탈락자 171명의 34억여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며 “단지 행정비용을 이유로 국가시험 관리시스템의 허술함을 변명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98년 국가시험 관련소송은 6명의 7건이었으나 99년에는 200여명의 21건으로 크게 증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의미심장한 일.

특히 2000년도부터는 사법시험 1차를 4번 보면 4년간 응시조차 못하는 ‘4진 아웃제’의 당사자가 처음으로 나오게 되어 사정이 크게 다르다. 올해 1차시험이 4번째인 수험생은 이번에 떨어지면 4년 동안 시험볼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법조인들은 “올해 시험도 부실하게 출제되면 전례없는 대규모 소송 사태가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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