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속 의학]영화 '해피엔드'/쉽게 죽이고 쉽게 죽어

  • 입력 2000년 1월 12일 01시 59분


평소 아내의 구박에 말대꾸 한 번 변변히 못하고 시장에서 몇 푼의 반찬 값 때문에 속상해 하는 남편, 아기 우유를 도맡아서 타먹이던 심성 좋고 소심하던 그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냉혹하고 면밀한 살인자가 된다. 잠자고 있는 아내의 침실에 몰래 숨어 들어와 흉기를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휘두르는 모습은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해피 엔드’에서 말이다.

특히 의학적으로 봐서 살인 장면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크게 떨어뜨린다.

살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초범자의 살인은 대부분 우발적이어서 피해자는 처음 가격당한 상처가 아니라 뒤따라오는 합병증 때문에 숨진다.

초범자의 경우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해도 실제상황에선 공포감과 극도의 불안감 때문에 상대방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히기 어렵다.

더구나 이 영화에서 아내를 아무리 미워했다고 해도 둘 사이에 아기가 있는 상황이고 그 아내가 놀라서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상황이라면 상대방에게 흉기를 여러번 휘두르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

전도연이 너무 쉽게 죽는 것도 법의학적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 사람은 일단 위급상황에 몰리면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괴력이 생긴다는 것의 의학계의 정설이다. 살인상황은 최대의 응급상황이고 이 상황에서라면 한 손으로 목을 누르고 있는 초범자 남편을 넘어뜨리는 것은 물론, 반격까지 가능하다. 그것이 본능이다.

더욱이 며칠 후 아기와 함께 거실에서 아무런 악몽 없이 늦은 해를 받으며 잠에서 깨어나는 남편의 모습은 왜 이 영화가 ‘해피 엔드’가 아닌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김형규<고려대 의대 김형규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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