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중심을 잡으셔야지요

  • 입력 2000년 1월 7일 19시 53분


새천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서울 한복판 인사동에서는 작지만 이색적인 행사가 있었다. 문화인들이 주축이 된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 주는 4회 풀꽃상 시상식이었다. 수상대상이 흥미롭다. 본상은 ‘인사동 골목길’에, 부상은 인사동 터줏대감인 고서점 통문관(通文館)주인 이겸로(李謙魯·90)옹에게 주어졌다. 본상 선정이유를 보자. “제어되지 않는 속도와 큰 길의 가치만 숭앙되는 메마른 땅에서 한줄기 개울처럼 우리를 느긋하고 고즈넉하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을 회복시켜주는 골목길의 정서적 가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렇다. 그동안 우리는 넓고 큰 길을 달려오느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새천년에는 골목길을 걷는 여유와 느림의 가치를 느끼면서 살아 볼 차례다. 20세기는 자연과 대항한 개발과 성장의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환경파괴와 갈등 소외 반(反)인권 반(反)생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새천년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명의 시대요, 상생(相生)의 시대다. 이러한 근원적인 의식의 대전환(大轉煥)이 이뤄지지 않으면 인류는 생존할 수 없다. 이것이 새천년이 주는 메시지다.

▼逆風이 불어오는 곳▼

우리는 어떤가. 이땅에는 새천년의 메시지를 거스르는 역풍(逆風)이 일고 있다. 그것은 총선바람과 함께 불어온다. 벌써부터 선심(善心)바람 공약바람 돈바람 개발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이 땅의 생명띠인 그린벨트와 군사보호지역 같은 것이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지역개발과 민원해소를 빌미로 ‘접경지역지원법’을 비롯한 갖가지 개발법이 잇달아 국회를 통과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전국 곳곳에서 투기와 개발열풍이 휘몰아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가운데 엊그제는 장밋빛 개발청사진인 국토종합계획까지 발표됐으니 그 열풍은 더욱 속도를 낼 것이다. 골프는 더 이상 특권층의 스포츠가 아니며 중산층 서민 등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각 부처가 앞다퉈 골프장지원책을 내놓고 있으니 골프장개발 바람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여기에 총선과정에서 표모으기에만 혈안이 된 입후보자들까지 갖가지 개발공약을 쏟아놓을 것이다. 국토계획이나 각종 개발법에는 물론 ‘친환경적’이니 ‘환경친화적’이니 하는 말들이 그럴듯하게 덧씌워져 있지만 그동안의 경험이나 환경전문가들의 분석을 보면 그것들은 당의정에 불과하다.

이젠 산 한귀퉁이가 잘려나갔느니, 대기나 수질오염수치가 다소 높아졌느니 하는 차원에서 환경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적어도 한 두 세기후 우리 자손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보다 큰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는 게 새천년을 맞는 자세다.

앞으로 갖가지 선심정책이 쏟아져 나오면서 총선바람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문제는 김대중대통령이 이런 바람의 한가운데에서 자칫 중심을 잃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징후를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보았다. 벤처와 중소기업을 육성해 20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느냐는 전경련의 비판 같은 것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다.

▼총선이후를 보자▼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김대통령이 얼마나 총선승리에 집착하고 있기에 대통령신년사에서 엉뚱하게도 신당 홍보를 하느냐는 것이다. 김대통령으로서는 이번 총선이 퇴임후의 권력향배 등과 관련해 과거의 어떤 선거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신년사에는 격이 전혀 맞지 않는 신당 자랑을 한 것은 대통령이 눈앞의 총선에 너무 쏠린 나머지 중심을 잃고 할 말과 안할 말을 혼동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다.

야당에서는 김대통령이 당적을 버리고 국정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적을 갖고 있건 아니건 대통령은 선거에 너무 빠져 있지 말고 좀 떨어져서 선거 이후, 임기만료 이후의 나라모양과 방향이 어떻게 될지를 더 많이 생각하는 긴 시야를 갖는 게 진정한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총선이 몰고오는 돈바람 거짓말바람 개발바람 등 온갖 잡스러운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뒤 이 산하와 우리의 마음, 사회 정치가 얼마나 더 황량해 질까 걱정된다. 우리 모두 고개를 번쩍들어 총선 이후를 보자.

어경택 <논설실장> 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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