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기현/물러날 때를 안 옐친

  • 입력 2000년 1월 2일 23시 04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20세기 마지막 날 전격 사임했다. 91년 8월 자신을 잡으러 온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사자후를 토해 반동쿠데타를 무산시켰던 옐친은 권좌에서 물러나면서까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새로운 세기는 새로운 인물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사임 이유였다.

모스크바 근교 고리키9 별장에 머물던 옐친은 이날 아침 크렘린으로 출근해 대통령선거를 6월 4일에 예정대로 치른다는 법안에 태연히 서명하는 등 최종 순간까지 사임결심을 숨겼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새해를 맞으러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려다 오전 10시께 크렘린으로 불려와 옐친의 사임 결심을 처음 들었다. 주요 각료들도 발표 1시간 전에야 알았다.

이날 정오 관영 ORT방송을 통해 하야성명을 발표하면서 옐친은 자신의 실정(失政)으로 고통받은 국민에게 처음으로 사과했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며 “많은 분들의 희망을 무너뜨린 것을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권력연장을 꾀한다는 소문이 나돌 때는 억울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옐친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인간적 면모는 그동안 그에게 실망했던 러시아 국민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옐친의 인기는 최근까지도 바닥을 헤맸지만 사임 직후 실시된 긴급 여론조사에서는 42%의 국민이 “섭섭하다”며 아쉬워했다. 러시아를 민주화와 시장경제로 나아가도록 만든 옐친의 업적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는 반응도 많았다. 옐친과 싸우던 정치지도자들도 이날만은 한 목소리로 옐친의 미래를 축복했다. 그만큼 옐친의 퇴장은 깔끔했다.

재임 8년 6개월 동안 옐친은 결과적으로 경제파탄과 사회혼란을 초래했다. 외교적 실수도 많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역사가 자신에게 준 시간을 헤아릴 줄 아는 거인이었다.

김기현〈모스크바특파원〉kimkiht@d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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