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45)

  • 입력 1999년 10월 14일 18시 26분


일곱 시 반쯤 되어서 보람이가 마당으로 들어서서 나를 찾았다.

할머니가 아저씨 오시래여.

나는 저 안에서의 오랜 습관 덕에 저녁을 일찍 지어 먹는 버릇이어서 저녁 밥은 여섯 시 쯤에 먹어 치웠다. 마루 아래 기다리고 섰는 보람이의 손목을 잡고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아랫집 마당에 들어서니 순천댁이 아예 전화를 마루에다 내놓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방금 전화가 왔는디 오 선생이 걸어 달라고 하데. 어여 한번 걸어 보소.

나는 남방 윗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어 정희네 집 전화번호를 입 속에서 중얼거려 외워 보고는 다이얼을 돌린다. 수화기 속에서 벨 소리가 들리고나서 여보세요 하는 정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 오현우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낮에 병원으로 전화 하신 뒤에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언니 생각도 났구요. 언닌 오 선생님에게 은결이 얘기를 남기려구 하진 않았어요. 아마 이 세상에선 두 분이 만나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나봐요. 지금 말씀드리지만 은결이를 우리한테 입적시킨 게… 언니가 독일로 떠나기 전 해인 팔십 칠 년이었습니다. 그애가 이듬해까지는 학교에 가야 했거든요. 물론 다 자라서니까 은결인 저희 엄마가 누군지 잘 알지요. 그래두 지금은 우리를 이모나 이모부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 아빠라고 한답니다. 죄송하지만 이해를 해주셔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거기서 정희는 말을 끊고 기다렸다.내가 재촉했다.

말씀 하십시오.

언니나 우리는 아이에게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려선 미국에 갔다고 그랬구요, 몇 년 전부터는 돌아가셨다구만 해왔어요. 아까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나서 언니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바깥 세상에 나오셨으니 당연히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시간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구요.

나는 거기서 슬그머니 끼어들기로 했다.

정희씨 판단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곧 그애도 어른이 될테지요.

네 그렇습니다. 대학에 가서 생활의 폭도 넓어지구 그러면 자연스럽게 되지 않겠어요? 나는 조금 전까지 은결이하구 얘길 나누었어요. 즈이 아버지 친구고 돌아가신 엄마하구두 친구였던 분이라고 그랬어요. 은결이하구 한번 통화하구 싶어 하신다구요.

나는 처음처럼 또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니 아까는 그저 소식이나 알려구 했을 뿐입니다.

이미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올 거라구 얘길 해서 그애두 기다리구 있어요. 지금 이 층 제 방에 있는데 내려오라구 부를게요. 장황하고 복잡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우리는 그 앨 아주 사랑한답니다. 오선생님은 저희보다 더 하시겠지만. 전화 끊지말구 기다리구 계셔요. 지금 그 앨 부르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전자음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다른쪽 귓가로 바꿔 들었다가 아직도 목소리의 여운이 남아있던 원래의 귀 옆으로 되돌아갔다.

여보세요, 오 선생님?

예, 접니다.

전화 바꿀게요.

여보세요….

저것이 그 아이의 목소리다.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녹음기처럼 되받았다.

여보세요.

<글: 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