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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6월 15일 19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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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저녁에 서쪽 하늘을 보니까 불길한 진회색이었어요. 노을 한 줄기 보이지 않고 저 아래 먼 하늘 구석까지 시커메요. 오히려 우리 갈뫼 마을 부근의 하늘에는 붉은 노을의 빛이 바랜 옷감처럼 펼쳐졌는데요.
비 오겠다. 서편 하늘에 노을이 없으면 비가 온다구 늙은 농부들이 말했어.
당신이 툇마루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구요.
어쩐지 고추잠자리들이 기어서 날아다니더라.
하면서 나도 빨래를 걷었지요. 우리가 저녁 상을 차려서 마주 앉을 무렵에 아직도 저녁 빛이 완전히 저물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어두워지는 거예요. 내가 일어나서 방의 불을 켜야 했어요. 서늘한 바람이 밀물이라도 몰려오듯이 일시에 솨아 하며 불어오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마당이며 지붕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건 여름 소나기처럼 뇌성 벽력을 치며 성급하게 몰아치는 비가 아니라 차츰 빗방울이 많아지면서 줄기차게 주룩주룩 내리는 초가을 비가 틀림없었어요. 그날 밤부터 바람이 거칠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바닷가에서는 배가 모두 방파제에 묶여 있고 태풍주의보라도 내렸겠지요. 갈매기도 한 마리 날지않고 하얀 이빨을 드러낸 검은 파도가 끊임없이 몰려오다가 암벽에 부딪혀 높은 물보라를 올리며 부서져 나갈 거예요.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당신과 나는 저 거친 풍랑 가운데 초라하고 볼품없는 뗏목에 몸을 묶고 떨고 있어요.
창 밖에서 대숲이 거세게 바람에 휘몰리는 소리는 얼마나 을씨년스러운지. 나는 당신의 팔을 베고 돌아누운 채 폭풍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를 불안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물결이 벽처럼 솟아올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한꺼번에 덮칠 거예요. 그때에 나는 저 먼 곳에서 큰 배인지 사람의 따뜻한 마을인지 알 수 없는 불빛 몇 점을 발견하고 당신과 함께 맸던 밧줄을 자릅니다. 용감한 당신이 먼저 그곳으로 헤엄쳐 가도록.
승리하리란 희망도 없이 투쟁하였으며
몸 성히 귀향하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다
초소 하나가 비었다 상처가 터진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나는 쓰러졌지만 패배하지 않았고
나의 무기는 부러지지 않았다
오직 나의 가슴만 부서졌을 뿐
다시 그 이튿날도 하루 종일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지요. 나는 당신의 속옷들이랑 양말과 셔츠와 재킷이며 면바지 등속을 펴서 접거나 다려서 당신의 가방 안에 잘 정돈해서 담았어요. 원래는 점심 먹고나서 오후에 떠난다고 했는데 내가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어도 왜 그랬는지 우리는 둘 다 밖으로 나서지를 못했죠. 아마 그때까지도 비가 와서였을까.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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