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다시 「들러리」역은 안된다

  • 입력 1999년 5월 25일 19시 30분


한반도주변의 시선이 온통 미국의 윌리엄 페리 대북(對北)조정관의 북한 방문에 쏠려 있다. 미국의 장관급 인사가, 그것도 대통령특사자격으로 행정부 공식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에 갔으니 그럴만도 하다. 북―미(北―美)관계 50년에 처음 있는 ‘대사건’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페리가 갖고간 대북 협상안은 경우에 따라 한반도의 풍향을 바꿀지 모른다. 미국 대통령의 친서와 한국대통령 일본총리의 메시지까지 휴대했으니 그가 돌아올 때는 뭔가 갖고 오지 않겠는가.

▼ 北-美관계 새 기류 ▼

페리가 북한측에 내놓을 제안은 비교적 단순한 내용이다. 북한이 미사일이나 핵 개발을 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각종 대북압력 수단을 해제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평양당국의 의견을 들어보고 필요하다면 자신이 곧 백악관과 의회에 제출할 대북정책 보고서에 북한의 뜻을 반영하겠다는 ‘선의(善意)’가 들어 있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어떻게 나올까. 첫째는 두말하지 않고 페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둘째는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 넷째는 조건부 수용 또는 부분적 거절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북한이 페리의 제안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절할 가능성은 적다. 지금 북한은 페리의 제안을 두말 못하고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쫓기는 입장이 아니다. 반대로 미국대통령 특사를 오게 해 놓고 ‘안전(眼前)거절’을 할 만큼 북한 외교가 무분별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입장을 유보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거나 조건부 수용 또는 조건부 거절의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북―미간에는 새로운 협상의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같은 ‘새로운 협상의 개막’에 앞서 우리가 명심해 둘 일이 있다. 그 협상이 북한과 미국만의 협상이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남북한간 협상의 문도 동시에 열리도록 해야 한다.

94년의 북―미 제네바협상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서 북―미협상을 강건너 불보듯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가.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해서 큰소리 한번 못낸, 협상의 들러리격이 됐는가. 한미(韓美)공조의 다짐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때도 우리 외교관들과 미국외교관들은 ‘함께 북한을 어떻게 해보자’는 약조를 수없이 했다. 그래서 제네바협상 초기 단계에는 ‘선(先)남북대화, 후(後)북―미협상’이라는 원칙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원칙은 변색한다. 얼마후 “북―미간의 협상진전은 남북관계진전과 병행해야 하며 남북관계진전이 없는 북―미간 협상진전은 불가능하다”는 이른바 남북대화와 북―미협상의 ‘병행원칙’이 슬그머니 등장했다. 그러다 제네바협상이 마무리되어 가는 단계에서는 아예 남북대화문제가 사라졌다. 우여곡절을 거쳐 북―미 제네바합의문 제3항에 “…북한은 남북대화에 착수한다”는 규정을 넣기는 했지만 그 이후 제대로 된 남북대화는 한번도 없었다. 북―미관계는 남북한관계에 아랑곳없이 혼자 굴러갔다.

▼ 南北대화 병행돼야 ▼

제네바 협상이 준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는 미국의 대북관(觀)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지극히 당연한 현실을 가끔 잊는다. 마치 미국도 분단의 애절한 아픔을 우리처럼 느끼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을 보는 눈은 세계전략차원이다. 북한의 대량파괴무기가 동북아의 안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미국의 국익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것이다. 남북대화는 우선적으로 남북한간의 문제라는 것이 미국의 기본 인식이다. 그러니 남북대화를 해야 한다는 워싱턴의 대북압력이 평양에 제대로 먹혀들어 가겠는가.

당면문제는 페리의 방북 결과 머지않은 장래에 새로운 북―미협상이 시작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냐다. 물론 한미 양국은 또 기회있을 때마다 대책회의를 열고 공조를 다짐할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金泳三)정부가 그런 외교적 장치가 없어서 제네바협상의 ‘들러리’가 된 것은 아니다. 일차적으로 미국을 남북대화의 장(場)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주도적 외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햇볕정책을 강조해도 과거처럼 북―미협상에 끌려다니다가는 또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페리의 방북결과가 반드시 남북관계 진전으로 직결되게 해야 한다.

남찬순 (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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