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개혁 허무주의

  • 입력 1999년 4월 2일 19시 27분


김대중정부의 ‘개혁의지’는 살아있는가.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개혁의지 실종의 예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정부조직개편이나 장관경질인선문제는 접어두고라도, ‘개혁’을 지향하는 정부여당의 처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우선 가까운 예로는 3·30재보선 과정에서 보여준 반개혁적인 행태다. 국민회의 총재인 김대중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선거 13일 전인 지난달 17일 청와대회담에서 ‘정치개혁’을 위해 공동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와 함께 본격화된 선거운동과정은 향응 및 금품제공, 불법사랑방좌담회, 관권개입, 흑색선전, 폭력 등 갖가지 부정과 불법 타락으로 얼룩졌다. 만약 총재들의 ‘개혁합의’가 빈말이 아니었다면 선거판이 이렇게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與圈서 혼탁선거 앞장 ▼

여야 모두의 책임이긴 하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여(與)의 책임이 더 크다. 우선 여당이 국정과 개혁을 선도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는 중앙선거관리위가 단속 처리한 선거법위반 건수를 봐도 그렇다(표 참조). 선관위 단속에 걸린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고 엄청난 돈이 뿌려졌다는 게 현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작년 7월의 경기 광명을 보궐선거에 이어 또 한번 타락선거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단속건수만 놓고 책임의 경중을 단정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으나 추세는 읽을 수 있다. 표를 보면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위반건수가 한나라당보다 휠씬 많다. 선거가 끝나고 혼탁 타락선거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뒤늦게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대행은 앞으로는 중앙당이 직접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중앙당간부들과 의원들의 떼거리 선거개입이 과열 혼탁을 부채질하는 주요원인이라는 언론의 지적은 선거운동 초반부터 있었다. 그때는 외면하다가 이제와서 중앙당개입자제니 제도개선이니 하면서 타락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중앙당개입행태는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이밖에 김대중정부의 개혁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대선 때 내걸었던 주요 공약을 ‘판단 잘못’ 등 간단한 말 한마디로 헌신짝처럼 내버리거나 뒤엎어 버리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지않은 대표적인 예가 특별검사제도입, 검찰총장 등에 대한 인사청문회 실시, 읍면동 폐지, 그리고 없앴던 공보처를 국정홍보처라는 이름으로 부활시키려는 것 등이다. 인권법은 일단 정부안을 만들었으나 이것도 인권보호를 위한 장치로는 미흡하다고 30여 인권단체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재야원로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손바닥 뒤집기식 公約▼

이런 공약들은 지난 대선 때 김대중후보의 ‘인권존중’ ‘개혁’이미지를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기상품’들이다. 이런 상품을 보고 표를 준 유권자도 적지 않았으리라.

특히 새정부출범과 함께 없앴던 공보처의 부활에 대해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와 대다수 언론기관에서 ‘반개혁적’이라며 반대하는 데도 정부는 귀를 막고 있다.

개혁의지 실종의 예들이 잇따라 생겨나는 원인이 공동정권 운영때문이건, 내각제와 관련된 말못할 속사정때문이건 그건 여권내부의 문제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변명이 될 수 없다. 개혁허무주의가 생겨나 번져나간다면 그 본질적 책임은 김대통령에게 있다. 아직은 대통령중심제이지 내각책임제는 아니다.

어경택〈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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