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대중문화 동반시대 5]애니메이션

  • 입력 1999년 1월 14일 19시 10분


코멘트
《애니메이션(animation·만화영화)강국인 일본. 전세계를 휩쓴 미국의 디즈니가 도저히 뚫을 수 없었던 그 막강한 파워의 중심에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있다. 그에 비한다면 한국의 창작 애니메이션은 불모지나 다름없지만, 꿈을 꺾지 않고 새 싹을 틔우려는 개척자들이 있다. 일본 스튜디오 지브리와 한국의 창작애니메이션 산실들을 각각 찾아가봤다.》

▼일본: 디즈니도 손든 탄탄한 기획▼

만화영화로 세계를 제패하다시피 한 미국의 월트 디즈니가 맥을 못추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92년 ‘미녀와 야수’(흥행수익 17억엔)를 누른 일본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27억엔), 94년 ‘라이온 킹’(20억엔)을 이긴 ‘너구리대작전 폼포코’(26억엔), 95년 ‘포카 혼타스’(7억엔)를 물리친 ‘귀를 기울이면’(18억5천만엔)…. 97년에는 ‘원령(怨靈)공주’가 1백억엔 이상의 엄청난 흥행수익을 올리며 디즈니 만화영화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극영화까지 모두 제압했다. 이 히트작들의 산실은 모두 한 곳, ‘스튜디오 지브리’다. 85년 설립, 극장용 애니메이션에만 주력해온 스튜디오 지브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흔들림없는 진지를 구축한 꿈의 메카다.

그 성공의 비결은 뭘까. 지난달말 일본에서 만난 스즈키 토시오(鈴木敏夫·51)사장은 우선 ‘기획의 다양성’을 꼽았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천착(원령공주)하는가 하면 여중생의 사랑 이야기(귀를 기울이면), 전쟁(붉은 돼지)과 가족애(이웃의 토토로)를 다루고 노인들이 봐도 즐거운 일본의 전통적인 소재(너구리대작전 폼포코)도 잊지 않는다. 올해 7월 개봉을 목표로 제작중인 ‘이웃의 야마타’는 중년층을 타겟으로 한 애니메이션.

스즈키 사장은 “기획의 원칙은 재미와 함께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원령공주’도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일본인들에게 ‘살아라!’는 메시지가 어필해 대성공했다”는 분석.

아사히신문 연재만화인 ‘이웃의 노노짱’을 소재로 한 ‘이웃의 야마타’의 기획도 이 시대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했다.

“‘이웃의 토토로’의 뒤를 잇는 이웃 시리즈 2탄입니다. 요즘처럼 단절된 시대엔 옆집에 이런 이웃이 살면 좋겠다고 느껴질만한 이야기가 절실하지 않을까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스튜디오 지브리의 양대 거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58)와 다카하타 이사오(高畑 勳·64).두 사람을 필두로 한 ‘감독 중심주의’는 기획단계서부터 캐릭터 상품 개발을 고려하는 미국 디즈니와는 달리 ‘작품 제일주의’로 이어진다. 인기 있는 토토로 캐릭터 상품도 영화 개봉후 2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졌다.

외부하청을 주지 않기로 유명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는 안정적인 수입과 복지가 보장된 1백10명의 스탭이 모두 한 작품에 매달린다. 모기업인 출판그룹 도쿠마 쇼텐과 도에이동화 등 메이저 제작사, 방송사, 광고회사 등이 주요 투자자들.

현재 미야자키 하야오는 ‘원령공주’가 마지막 작품이라는 소문과 달리 2001년 개봉을 목표로 10살짜리 소녀가 주인공인 새 영화를 제작중이다. 스즈키 사장은 “미야자키와 다카하타가 아직도 작품을 만들지만 지브리의 가장 큰 문제는 두 사람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한국 시장진출과 관련해 그는 “아시아 지역은 모회사인 도쿠마 쇼텐이 배급하는데 한국은 미국 배급권을 갖고 있는 브에나비스타(디즈니 배급사)가 맡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한국: 불모지에 돋는 창작의 새싹▼

믿기지 않겠지만 한국은 세계 3위의 애니메이션 생산대국이다. 그러나 99% 이상이 미국 일본의 주문을 받아 제작하는 하청, 가공업. 독자적인 창작 애니메이션은 1% 정도에 불과하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67년 국내 최초로 ‘홍길동’이 제작된 이래 붐을 이루다 80년대 후반이후 잦아들었다. 95년, 4편이 동시에 제작되는 반짝 붐이 있었지만 흥행실패로 맥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부활의 조짐이 보인다. 지난해 선보였던 ‘누들누드’는 비디오가게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성인용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도 몇몇 프로덕션들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진행중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창작 애니메이션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5백여종의 캐릭터 상품이 팔리고 있는 ‘아기공룡 둘리’다.

제작사인 둘리나라는 7월 개봉을 목표로 차기작인 ‘작은 악마 동동’을 준비중. 김수정 대표(49)는 제작경험이 더 쌓이면 TV드라마로 방송됐던 자신의 만화 ‘7개의 숫가락’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95년 극장용 애니메이션 ‘아마게돈’을 제작했던 B29엔터프라이즈의 김혁대표(35). 그의 두번째 작품은 1백% 컴퓨터로 제작한 로봇 애니메이션 ‘철인사천왕’. 제작을 마치고 다음달 중순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만화가 박재동씨(47)도 투자자를 못구해 중단됐던 극장용 애니메이션 ‘오돌또기’의 제작을 올해 다시 시작한다. 그는 매주 일요일 밤 MBC 9시뉴스에서 시사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또 지난해 케이블TV 투니버스에서 ‘영혼기병 라젠카’를 기획했던 이정호PD(34)는 진돗개를 모델로 현재 제작중인 ‘백구’를 연말쯤 개봉할 예정.

불모지에 도전하는 이들의 고충을 듣다보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약한 고리가 보인다.

“머리는 없고 손발만 있는 기형적인 모습이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의 현주소다. 하청생산으로 기술은 발달됐다고 하지만 독자적인 색채와 캐릭터를 만들어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그 기술력도 사실 허상에 불과하다.”(김혁)

“둘리는 원래 만화잡지에 11년간 연재된 출판만화에서 시작됐다. 성공한 출판만화를 기초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제작비가 50%는 절감된다. 출판만화를 저질 취급만 하지 않았어도 애니메이션은 지금보다 발전했을 거다.”(김수정)

“창작 애니메이션이 발전하려면 극장용만으로는 어림없다. TV가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20분짜리 애니메이션 한 편의 제작비가 7,8천만원 정도인 반면 수입품은 2백50만∼3백만원의 헐값에 사올 수 있어 방송사들이 제작을 기피한다. 이때문에 TV의 국산 애니메이션 의무상영제같은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박재동)

이들은 “창작을 위한 전문인력 양성과 방송사들의 투자 확대 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36년간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온 일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