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44)

  • 입력 1998년 12월 8일 19시 39분


휴거 ⑤

작은 출판사 영업부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승주는 거의 노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사업 구상에 바빴고 자기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은 너무 앞서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에 바빴고 또 여자 문제에 대한 상담을 받느라고, 자신 역시 여자를 만나느라고 바빴다.

승주가 조국에게 물었다.

“너희 사장은 아마존 갔다며? 언제 오냐?”

“와야 오는 거지 뭐. 나 혼자 브라질 교민대회 준비하느라고 정신 없어.”

조국은 네모난 턱을 치켜올리고 트로트 가수처럼 눈썹을 꿈틀거려가며 설명한다.

“상파울루에 연예인들 데리고 가서 극장쇼도 하고 골프대회도 하고 뭐 그런 쇼 비즈니스야. 내년 총선 때 정치광고도 해야 하고 지난번 계약한 ‘신비의 마야 잉카전’도 플랜을 짜야 하는데 혼자 일하기 정말 벅차다. 브라질 건은 캔슬해 버릴까 생각중이야.”

‘캔슬’ ‘쇼 비즈니스’ ‘트라이’ 등은 조국이 즐겨 사용하는 직업용어였다. 한편 빚쟁이를 상대할 때는 ‘노 프라블렘’ ‘테이크 잇 이지’ ‘돈 워리’ 이 세 마디로 ‘배 째라’는 의사를 충분히 표현하는 모양이었다.

“야, 그걸 왜 캔슬해. 한 건만 하면 일 년 먹을 건 나온다면서.”

“헌팅하러 브라질에 가봐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말이지.”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노느니 내가 네 일이나 좀 봐줄게.”

그제서야 조국은 실토했다.

“브라질에 인맥이 있어야지. 그리고 언론하고 협찬사를 끌어내야 할 텐데, 그쪽 인맥은 전부 사장 라인이지 가방 모찌만 한 내가 뭘 알겠냐. 실은 회사 경비도 한푼 없어.”

조국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승주는 꽤나 심심했다.

“브라질에 왜 인맥이 없어? 오늘 두환이가 남미로 갔잖아. 신문사 문제는 형준이 쟤가 김부식인가 하는 동창놈하고 친하고, 돈이야 너희 사장도 없이 시작했다면서 외상 끌어대면 될 거 아냐? 협찬받고 표를 팔면 그게 십억 단위라며?”

“성공만 하면 끝내주지.”

“야, 펜팔 전시회 때 생각 안 나냐? 우리가 멋지게 성공시켰잖아. 이번에는 브라질에 가서 붙어보는 거야. 이 참에 좀 놀기도 하고.”

“좋아. 그럼 너 때려치고 내일부터 우리 사무실로 와라. 형준이 너도.”

단순한 놈들은 참 시원스럽기도 하다. 코라도 비빌 듯이 얼굴을 가까이 댄 채 그들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술집 주인이 막 틀어놓은 텔레비전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날 밤 세상 한쪽에서는 휴거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일이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기도하고 울부짖고 또는 조용히 꿇어앉아 종말을 준비했다. 열심히 텔레비전을 보던 주인이 그들의 기세에 질렸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이러다가 정말 내일이 안 오는 거 아냐? 그 동안에도 승주와 두환이는 출정 전의 관우와 장비, 혹은 저팔계와 사오정처럼 천하를 들먹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죽음 앞에서라면 어떤 삶이든 의미가 없다. 그러나 종말이란 어떻게 오든 한 번뿐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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