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15)

  • 입력 1998년 11월 5일 19시 17분


교유 ⑧

조국은 봉단과 함께 한쪽에서 낄낄거리고 있었고 승주는 자신을 둘러싼 여학생들의 기대에 성심껏 보답했다. 소희는 흰 구름처럼 가볍고 지루해 보였다. 두환의 표정은 잘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날 야유회의 전반적인 풍경이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은 몹시 붐볐다. 철도청 못지 않게 교육청도 탈선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행락철이었으므로 우리는 불심 검문에 대비해야 했다. 여학생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봉단이 갑자기 뛰는 게 보였다. 나머지 여학생들, 그리고 봉단에게 손목을 잡힌 소희도 뛰어가고 있었다. 분식집에서의 2차를 기대했던 우리는 서운한 가운데도 몹시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의문은 다음날 바로 풀렸다. 봉단이 뛴 것은 우려한 대로 생활지도 선생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인사를 했으면 그만일 것을 도망치는 바람에 의심을 샀다. 선생은 다음날 소희 일행을 교무실에 불러다놓고 갈래머리를 몇 번 잡아당긴 끝에 모든 자백을 받아냈다. 그런 다음 친절하게도 ‘순진한 본교 여학생’들을 꾀어낸 ‘귀교의 불량학생’을 처벌하는데 참고로 하라며 우리 학교에 4인방의 명단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 넷이 두름에 꿰인 굴비처럼 벌을 받는 동안 교무실의 분위기는 시종 훈훈했다. 또 저놈들이야? 이번엔 그냥 두면 직무유기겠지? 그러엄, 긴급조치 위반이지. 물리선생, 교련선생, 고전선생, 세계사선생, 담임선생… 교무실은 지뢰밭이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정학을 맞았다.

사전에 따르면 정학이란 ‘한때 학교를 그만두게 하는 처벌’이다. 집에서 놀기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그처럼 신나는 일을 거저 해준다면 학교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도서관으로 등교를 해서 하루 종일 반성문을 써야 했다. 조금만 떠들어도 그곳 서무가 간수처럼 눈을 부라리며 바를 정(正)자에 가차없이 한 획을 보탰다.

정학이 풀리는 마지막 날에는 보호자가 학교로 나와야 했다. 승주는 기타를 가르쳐준다고 꼬여서 대학생인 누나 현주를 데려왔다. 내 쪽으로는 휴가병인 팔촌 형이 왔고 조국의 보호자로 온 것은 단골 중국집의 주방 아저씨였다. 두환의 어머니는 보험 외판이 바빠서 아예 걸음하지 못했다. 담임선생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우리를 참견하러 왔던 물리선생의 입은 예쁜 현주 누나한테 눈길을 떼지 못하느라 덩달아서 다물어지지 못했다.

학교를 나온 우리는 주방 아저씨를 앞세우고 중국집으로 갔다. 소희와 봉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두부는 없었어도 국사범이 특사로 풀려나는 날처럼 구색은 다 갖췄던 것이다.

두환은 망설임없이 성큼성큼 소희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놀랍게도 소희는 그런 두환을 흰 장미꽃잎이 날리는 듯한 미소를 짓고 올려다보았다. 승주의 눈꺼풀이 몇번 급하게 깜박였다. 그러나 잔머리를 잘 굴리고 연기에 능한 승주는 이내 태연해졌다. 소희의 속셈을 뻔히 안다는 듯한 여유있는 태도였다.

<글:은희경>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