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병무비리 리스트 밝혀야

  • 입력 1998년 6월 14일 18시 42분


병무비리에 대한 군 사정기관의 수사가 축소 은폐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병역을 사고 파는 ‘검은 거래’를 철저히 파헤치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국방부는 당초 군 고위장성이나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자가 뇌물수수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고 발표했다. 단순히 부유층 민간인이 중하위 군 간부에게 돈을 주고 병무청탁을 했다는 것이 국방부측 설명이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 발표가 있은 지 이틀만에 전 육군참모총장의 동생이 모병연락관에게 상습적으로 청탁을 해왔고 현역 준장 두명이 병무담당자로부터 금품을 상납받고 사병의 부대배치 등에서 특혜를 준 것으로 확인했다. 육본 인사참모부와 부관감실에 근무한 전현직 장성 10여명도 연루됐다고 한다. 청탁인 가운데 사회지도층은 단 한명도 없다고 단호하게 부인하던 군 검찰이 전 국회의원 변호사 등이 리스트에 들어 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국방부가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

군수품을 떼먹거나 전력증강사업 이권에 개입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전형적인 군 부패 행태였다. 이에 비해 병역의무를 돈으로 매매하는 비리는 훨씬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사병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뿐 아니라 자칫 군대가 비리의 온상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군 당국의 안이한 대처는 정권교체 이후 새 정부의 개혁의지까지 의심케 할 수 있다. 군 내부비리에 대한 감시와 사법처리는 군이 자체적으로 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건의 주범과 수사축소 책임자가 군 사정기관인 헌병인 점도 문제다. 부정을 감시해야 할 사정기관이 부패고리의 공생관계에 얽혀 있었다니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 아닌가. 군의 자체 사정기관이 비리에 연루됐다면 외부 수사기관을 투입하는 조치를 강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군검찰이 확보한 병무청탁자 리스트에 올라 있는 4백여명을 공개하라는 여론은 높다. 연루자에 사회지도층이 많이 포함돼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나온 분노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런데도 청탁자 리스트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군 당국은 우선 이들 명단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군의 개혁의지가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육본 모병연락관이 10여년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도 의혹 중 하나다. 군 당국은 모병과 부대배치 비리를 없애기 위해 관련 담당자들을 순환보직하겠다고 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군이 새로 태어나야 한다. 병무비리의 철저한 수사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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