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어두울 때는 등불을…」

  • 입력 1998년 5월 29일 07시 37분


어떤 스님이 경청스님에게 말했다. “학인(學人)이 줄()을 하겠으니 스님께서 탁(啄)을 하여 주십시오.”

“살아 날 수 있겠느냐?” “살아나지 못한다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경청스님이 말하였다.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선(禪)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다. 뚝, 언어의 길이 끊긴 (言語道斷) 경지. 온갖 마음의 갈피마저 접은 심행멸처(心行滅處), 그 연후라야 깨우치는 선의 화두(話頭).

하지만 속인(俗人)이 어찌 ‘선미(禪味)’를 아랴.

저마다 몰래, 욕심의 왕궁을 지어놓고 개미귀신처럼 숨어서 인생을 제멋대로 낚아채려는 속인들. 미끼가 탐이 나 어항에 들어 온 물고기처럼 자기 인생을 집착의 어항에 가둬 놓고 헉헉대는 중생.

하지만 선사들이 남긴 화두를 ‘선(禪)밥’으로 알고 그 밥알을 꼭꼭 씹어먹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녹아들어 마음이 평안해지기도 한다.

톡톡 탁탁…, 산사(山寺)의 목탁소리에 기대 듯, 화두에 의지해 하나 둘씩 욕심보따리를 찢어 나가다보면 어찌어찌, 맑고 맑은 햇살에 자기자신의 본모습이 환히 비치기도 한다.

윤재근교수(한양대)의 ‘어두울 때는 등불을 켜라’(문학수첩).

노장철학을 우화 형식으로 푼, 밀리언셀러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의 저자. 그가 이번엔 선(禪)에 손을 댔다. 기어코,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걸까.

저자는 소나무가 죽은 뒤 수천년이 지나서 호박(琥珀)으로 태어난 선사(禪師)들의 화두를 지팡이 삼아 진뜩진뜩한 송진 같은 속인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선을 빗대어 비유하듯, ‘구멍없는 자물쇠’를 여는 일이,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손뼉소리’를 듣는 일이 어찌 만만하겠는가.

그래서 이 책은 50여가지 화두의 풀이 글과 저자의 길잡이 글이 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선(禪)과 속(俗), 산사와 세간(世間)의 그 거리만큼이나 불균형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의 구수한 입담을 따라 풀어보는 ‘경청줄탁(鏡淸啄)’의 화두.

병아리가 달걀 안에서 껍데기를 쪼는 것이 줄()이고, 어미닭이 달걀 밖에서 껍데기를 쪼는 것이 탁(啄)이다. 이처럼 안팎으로 함께 쪼아야 병아리가 껍데기를 깨고 세상에 나오는 법. 혜옹선사가 말한 ‘줄탁동시(啄同時)’.

선사의 화두는 달걀을 쪼는 어미닭의 부리와도 같다. 화두를 대하는 대중은 달걀 속의 병아리. 안에서도 열심히 쪼아야 한다. 마음속 번뇌와 욕심의 껍데기를 쪼아 깨뜨려야 한다. 이렇듯 안팎의 쫌이 ‘조응(照應)’해야만 껍데기 밖으로 나와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경청스님이 물었다. 살아날 수 있겠느냐?

이에 ‘마음을 비웠다’는 천연덕스러운 답변. 그래서 호된 불호령이 떨어졌다. 형편없는 놈!

선사의 화두는 맑고 향긋한 한 잔의 찻물과도 같다. 대중의 마음 속에서 진동하는 썩고 더러운 냄새를 말끔히 씻어준다.

화두는 또한 파리채와도 같다. 욕심의 왕궁에 쉬를 치는 미혹의 파리떼를 후려친다. 어찌 파리채 뿐이겠는가. 포도대장도 되고 몽둥이도 되고 대침(大鍼)도 된다.

하지만 선사의 말 토막을 줄줄 왼다고 될 일이 아니다. 왜 달마는 서쪽에서 왔느냐고 묻자 조주선사가 말하지 않았던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어떤 스님이 석두선사에게 물었다. “선이란 무엇입니까?”

“벽돌조각이다.”

“도란 무엇입니까?”하고 다시 묻자 이렇게 뱉어주었다. “나무토막이다.”

잣나무면 어떻고 개 짖는 소리면 어떻고 똥막대기면 어떤가. 정답이 없는데 답을 묻거든 사정없이 모른다고 내쳐라. 시원하고 후련하지 않은가. 남이 흘린 ‘침’이나 받아먹어서야 어찌 큰 길(道)에 드랴.

양산스님(혜적)이 삼성스님(혜연)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혜적입니다.”

“혜적은 바로 나다.” “저의 이름은 혜연입니다.”

양산스님은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만물이 일체라고 했던가. 네가 나이고 내가 너다. 나는 너에게 주고 너는 나에게 주니 서로 울담을 치고 가시철망을 칠 일이 없다. 너와 나를 주거니 받거니….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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