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③]현철씨의 「동숭동팀 해체」압력

  • 입력 1998년 1월 4일 20시 29분


‘문민개혁’의 산실(産室) ‘동숭동팀’이 본격적인 진용을 갖춘 것은 김영삼(金泳三)대표최고위원이 우여곡절 끝에 민자당 대통령후보가 된 직후인 5월말.

동숭동팀의 ‘팀장 겸 연락간사’격이었던 전병민(田炳旼)씨는 선거운동을 도우라는 김후보에게 이렇게 말하고 ‘숨은 개혁그룹’ 구성에 착수했다. “대표님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시는 것은 지금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님의 조직이 모두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낭비입니다. 우리 동숭동팀은 취임 후 5년간의 국정개혁프로그램을 만들겠습니다.” 김대표는 처음엔 “무슨 소리냐. 선거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전씨의 ‘희한한 소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동숭동팀이 ‘문민개혁 프로그램’의 산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김대표의 차남 현철(賢哲)씨의 ‘행동’ 때문이었다.

후보선출 직후인 어느날 전씨는 골프약속에 맞추느라 집을 나서다 현철씨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는다. “고속버스 터미널 부근 팔레스호텔에서 급히 만나자”는 전화였다. 현철씨는 팔레스호텔에서 전씨와 마주앉자마자 “그동안 수고하셨다”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동숭동팀을 해체하고 광화문팀의 엄효현씨하고 같이 일하는 게 좋겠다”고 마치 통보하듯 말을 꺼냈다. ‘광화문팀’은 언론분석과 여론조사를 주로 하던 현철씨 직할의 ‘사조직’.

그러나 현철씨가 해체하라고 종용한 ‘동숭동팀’은 5백∼6백명의 학자들이 동원돼 ‘문민개혁 프로그램’을 만든 ‘동숭동팀’과는 다른 팀이었다. 이를테면 대선 당시 문민개혁 프로그램을 만든 동숭동팀의 전신(前身)격. 말하자면 ‘제1기 동숭동팀’으로 90년1월 3당합당 직후부터 92년5월 김대표가 대통령후보로 선출되기 직전까지 비공식 자문역을 맡아온 팀이었다.

제1기 동숭동팀의 멤버는 9명. 김창열(金昌悅)한국일보논설고문 고건(高建)전서울시장 김덕 송정숙 송복 박재윤 김충남 전병민씨 등이었다. 전씨가 ‘연락간사’격이었다. 이미 김영삼대표와도 대여섯차례 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김대표가 제2이동통신문제 등을 놓고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과 갈등을 빚을 때를 비롯해 고비 고비마다 뒤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연설문작성에 관여하기도 했다. 특히 김창열고문은 모임의 어른이었다. ‘그런데 한마디 말도, 예우도 없이 차남을 시켜 동숭동팀을 해체하라니….’

골프약속도 바로 그 ‘제1기 동숭동팀’과의 자리였다. 전씨는 일단 “내가 광화문팀으로 가는 것은 추후 결정하면 된다. 하지만 그분들을 그렇게 대접해선 안된다. 김창열고문만 해도 한국일보사장까지 지내신 분이다. 대표가 직접 고마움을 표시하며 예우를 갖추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도로만 얘기하고 일어섰다. 필드에 섰지만 스윙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평소 싱글수준이었으나 이날은 나중에 기록표를 보니 1백타를 쳤다. 심지어 쇼트홀에서 드라이브를 들고 나가다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로부터 “전실장, 뭐하는 거야. 운동뇌가 고장난 것 아니야”라는 놀림까지 받을 정도였다고 당시 동숭동팀의 한 참석자는 기억했다.

골프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만취한 상태에서 집에 돌아오자 현철씨의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현철씨 전화’ ‘김소장 전화’라는 메모지가 10여개 있었고, 마지막 메모에는 ‘내일아침 7시반 플라자’라고 돼 있었다. 김대표가 동숭동팀을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정을 잡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현철씨의 태도는 전날과 1백80도로 달라져 있었다. “전실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님이 오늘 오후에 만나자고 하십니다.”

나중에 당시 상황을 전해들은 ‘동숭동팀’ 멤버의 전언. “현철씨는 그때까지도 아버지가 전실장에게 무슨 일을 맡겨놓고 있는지, 전실장이 아버지에게 어떤 참모역을 해왔는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엔 아버지가 후보가 됐으니 동숭동팀 광화문팀 테헤란로팀으로 분산돼있던 사조직들을 하나로 통합, 본격적인 선거기획을 준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실장에게 동숭동팀을 해체하라고 해놓고 아버지에게 보고했다가 ‘씰데없는 짓을 한다’고 혼이 났던 모양입니다. 동숭동팀은 그래서 사산(死産)을 면하고 팀을 확충, 개혁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전씨를 부른 김후보는 대뜸 “현철이가 씰데없는 소릴 한 모양인데…. 뭘 안다고…”라면서 “신경쓰지 말고 선거전략이나 마련하라”고 다시 힘을 실어줬다. ‘김소장’까지 따돌린 확실한 재신임이었다. 그 직후부터 동숭동팀은 맹렬하게 가동하기 시작했다.

전씨의 기억. “소연회실이 모여있는 신라호텔 23층은 우리 동숭동팀이 전세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날은 같은 층의 두세 군데 연회실에서 동시에 서로 다른 분과위의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보통 식사를 겸한 세미나였는데 점심 저녁을 두 번, 세 번 먹는 일도 많았습니다.”

문민정부에서 청와대정무 공보수석 문화체육부장관 정무장관을 지낸 주돈식(朱燉植)씨는 최근 “개혁의 준비작업은 정치 경제 사회의 3개 그룹별로 나뉘어 동숭동에 있던 전병민씨의 사무실 ‘임팩트 코리아’에서 이뤄졌다. 각 그룹 인사들은 다른 그룹 인사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주전수석마저도 동숭동팀의 전모를 알지 못했다.

동숭동팀에는 정치행정 경제 외교안보 사회 법률검토 ‘개혁홍보논리개발 및 부작용대책’의 6개 분과위원회가 있었다. 그리고 사회분과는 다시 환경 노동 교육 언론 여성 등 13개 소분과위로 세분된다. 주돈식씨도 밝히고 있지만 토론내용은 그때그때 전씨가 취합해 나갔다. 다른 분과위에 누가 참여하는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자신이 ‘동숭동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교수들도 많았다.

토론은 교수들이 했지만 토론내용을 기록, 정리해 문민개혁안으로 만든 사람들은 ‘중령들’과 전씨였다. 정부부처 출신 ‘중령’의 증언. “모든 회의는 은밀히 운영됐습니다. 우리는 각 분과위 토론에 참석, 핵심내용을 정리해 전실장에게 보고했습니다. 개혁안의 내용이 거의 ‘쿠데타’에 가까워서인지 전실장이 나중에 우리를 5.16쿠데타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던 영관급들에 빗대 ‘동숭동 중령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역시 토론에 참여한 교수 언론인 연구원들로부터 나왔다. 주돈식씨는 최근까지도 자신이 속했던 정치행정분과의 멤버들을 영문이니셜로 얘기하고 있다. 아마도 ‘인재 풀(POOL)’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인 듯 하다. 어쨌든 주돈식씨는 “내가 속했던 정치행정분과는 대학의 정치학교수 J씨, 대학원 행정학교수 L씨, 대학의 정치학(특히 헌법)교수 H씨, 전직 정치인이며 미국의 박사학위 소지자 L씨, 연구기관의 연구원 H씨, 국가연구기관의 연구원 K씨 등과 필자까지 합쳐 7명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복기(復棋)해냈다. 주돈식씨가 말하는 J, L, H, L, H, K씨는 차례대로 이화여대 정치학과의 진덕규(陳德奎)교수, 서울대행정대학원의 이달곤(李達坤)교수, 고려대 한배호(韓培浩)교수, 이종률(李鍾律)전의원, 외교안보연구원의 김충남(金忠男)박사였다. 경제분과는 서울대의 박재윤(朴在潤) 강광하(姜光夏)교수가, 외교안보는 외국어대의 김덕(金悳)교수와 서울대 외교학과의 정종욱(鄭鍾旭)교수 등이 전담했다. 사회분과에서 노동은 이원덕(李源德·노동연구원 부원장), 환경은 김정욱(金丁勖·서울대교수), 언론은 김정탁(金正鐸·성균관대교수), 그리고 여성은 동아일보기자를 거쳐 한국여성개발원장을 맡고 있던 권영자(權英子), 서울신문논설위원인 송정숙(宋貞淑)씨 등이 중심인물들이었다. 특히 통일 이후 국토개발계획은 국토개발연구원의 이건영(李建榮)박사가 주축이 돼 ‘통일 이후’를 준비했다.

동숭동팀 중 주돈식 박재윤 정종욱씨는 모두 김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정무 경제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맡았다. 김덕 송정숙 권영자씨는 안기부장 보사부장관 정무2장관으로 발탁됐다.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의 저자이기도 한 김충남박사는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국토개발연구원의 이건영박사는 건설부차관에, 그리고 행정분과에 참여했던 염홍철(廉弘喆)전청와대정무비서관은 대전시장으로 발탁됐다. 적어도 ‘동숭동팀’이 문민정부의 두뇌집단이었다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이었던 셈이다. 토의내용도 매우 진지했다.

주돈식씨의 책 ‘문민정부 1천2백일’에 소개된 토의내용 중 ‘제4토의과제’인 ‘집권 5년 동안의 리더십 유지전략’, 그리고 ‘제7토의과제’인 ‘국회운영과 야당관계’를 잠깐 보자.

‘ⓐ개혁의 방법론

①5년단임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2년 안에 모든 개혁내용을 제도화하지 못하면 통치에 어려움이 온다.

②대통령 이미지를 국민의 친구, 아버지와 아저씨, 지도자, 사령관 가운데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③….

ⓑ취임후 5개월까지가 5년 임기동안의 리더십의 성격을 좌우한다.

①임명할 수 있는 정무직 2백명을 활용, 신선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②미국 OMB(관리예산실)가 예산과 기구개혁, 사정업무까지 담당하는 것은 ‘Money is Policy(예산이 곧 정책이다)’라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⑥취임부터 2년간은 강력한 장악, 개혁의 제도화로 지지를 확보하고 다음 2년간은 일관성위에서 안정을 다지는 시기로 한다. 마지막 1년은 후계자와 야당에 참여지분을 인정해 퇴임후의 안정을 이룩하는 것이 필요하다.

ⓒ야당대책

①최소한의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야당이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야당도 정치자금 배분에 참여시킨다.

②….’

등등이다.

주돈식씨는 “김영삼후보는 (동숭동팀의) 이 개혁보따리로 그 어느 후보보다 단단한 정책무장을 할 수 있었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단단한 개혁보따리’는 있었는지 몰라도 문민정부의 개혁을 체계적이고 영속적으로 이끌어 갈 ‘개혁주도세력’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게 사후평가다. 동숭동팀의 일부가 문민정부에 참여하긴 했지만 역시 개혁주도세력이 되진 못했다.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사실 김영삼당선자가 ‘동숭동팀’과 자리를 함께한 것은 당선 직후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나마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주돈식씨 등 정치행정분과위 전원과 경제분과의 박재윤, 외교안보의 정종욱, 그리고 김창열 권영자 송정숙씨 등 불과 20여명만이 초청을 받았을 뿐이었다. 전씨 자신도 정책수석내정자로 발표됐다 중도하차한 이후 김대통령으로부터 “전화 한 번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다. 김대통령은 혼자 뛴 것이다.

〈김창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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