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국난극복을 위해서는 정부와 정치권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여야가 다른 입장일 수 없다. 노사정(勞使政) 등 경제주체도 현 위기의 본질과 실상을 깨닫고 모두 함께 고통을 나눈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더구나 현 상황은 시시각각 우리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금융 외환위기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대내외적 신인도 제고를 위한 강도 높은 개혁조치들을 과감하고 신속하게 추진하지 못한다면 더 큰 재앙이 눈앞에 닥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치권이 위기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금융감독위원회의 설치규정과 금융기관 종사자의 정리해고 우선 도입문제를 둘러싸고 한때 진통을 겪은 것은 유감이다. 부실금융기관 처리, 정리해고제 도입 등은 해외 민간자본 유치를 통해 금융 외환의 구조적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전략적 차원의 정책대응이어야 한다. 금융감독기관 독립과 금융실명제 대체입법은 관치금융 철폐와 정경유착 근절을 제도적으로 담보함으로써 대외신인도를 끌어올리자는 개혁과제들이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와 미국 일본 등 주요국가들은 우리의 개혁의지가 입법을 통해 어떻게 가시화하는지를 주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번 개혁법안들은 차기정부의 금융개혁 방향을 가름하게 된다. 입법취지에 어긋나서는 안되며 개혁의 걸림돌로 작용해서는 더욱 안된다. 그런데도 금감위를 재정경제원산하에 둔다면 금융감독권은 이원화할 것이며 금융의 독립성과 중립성은 크게 저해될 수밖에 없다. 관치금융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외국투자가들의 의혹도 씻어낼 수 없다. 무엇보다 IMF가 요구하는 금융감독기구 독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여론이 거세자 국회가 금감위를 다시 총리실 산하에 두기로 한 것은 다행이지만 한때나마 재경원의 제몫 챙기기에 재경위가 동조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금융실명제 보완입법과 자금세탁방지법 제정문제도 그렇다. 금융실명제를 실제적으로 백지화한 것이나 자금세탁방지법 제정을 무산시킨 것은 반(反)개혁적이다.
국회는 앞으로도 경제구조개혁을 앞당기기 위해 서둘러 입법에 나서야 할 것을 뒤로 미루거나 무산시킴으로써 개혁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특히 부실금융기관 처리와 정리해고제 도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금융업뿐 아니라 제조업 등 전업종의 정리해고제 도입도 불가피하다. 노동계는 대량실업에 대한 보완책과 재벌개혁, 정경유착의 부패구조 청산작업없이 정리해고제부터 도입하는 것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정치권이 이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12인 비상경제대책위가 정리해고제 논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있는 것도 정치적 부담을 고려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노동계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면서 큰 틀에 있어서 국민적 고통분담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여야 모두 여기에서 비켜서려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