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53)

  • 입력 1996년 12월 25일 20시 19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27〉 신은 자비롭다. 그래서 양성이 하나로 붙어버리는 저주는 언제나 풀리게 되어 있다. 저주를 푸는 주문이라도 되는 듯이 현석의 가벼운 신음소리가 들린 뒤 우리의 몸은 갑자기 허무한 결락 속으로 빠져든다. 불현듯 추위를 느끼고 우리는 옷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벗을 때는 몰랐는데 차안이 너무 좁아서 옷을 제대로 끼어입을 수가 없다. 나는 왼쪽 부츠에 걸쳐진 속옷을 끌어올리고 그 위에 스커트를 덮어버림으로써 그런대로 쉽게 매무새를 수습했지만 다리가 긴 현석은 몸을 구겼다 접었다하며 가까스로 옷을 입는다. 우리의 동작은 뜨겁게 몸을 합했던 사람들같지 않게 너무나 침통하다. 이제야 엔진이 달궈졌는지 히터에서 나오는 바람에서 겨우 온기가 느껴진다. 현석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면서 한 손으로 시거라이터를 누른다. 현석의 뺨 위로 빨갛게 달궈진 시거라이터의 불빛이 보인다 싶더니 그 빛은 현석의 입술에 물려 있는 담배로 옮겨진다. 나는 어둠속에서 담배가 타들어가는 것을 쳐다본다. 담배가 다 타면 그는 떠날 것이다. 담뱃불은 결국 꺼진다. 그리고 현석이 차문을 연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차밖의 얼음땅에 한 발을 내딛는 그. 현석은 차문을 닫기 전에 꼭 한마디 한다. 『나오지마』 얼음을 밟고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 그가 떠나고 있다. 나는 곧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현석 같은 남자는 절대 아니다. 나는 현석처럼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될 남자와는 다시는 연애를 시작하지 않을 작정이다. 조금 덜 사랑할 만한 사람을 만나 조금 쉽게 헤어질 것이다. 내 잘못은 거기에 있다. 나는 현석을 정도 이상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버릴 수 있다면 헤어짐은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한참 후에 숙였던 얼굴을 드니 히터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에 차창을 덮었던 눈이 녹는 게 보였다. 현석과 나의 얼음성은 금이 가고 있었다. 창유리 위의 눈은 아주 느리게 미끄러 떨어진다. 그러자 균열 사이로 조금씩 어둠이 드러난다. 나는 이 캄캄한 어둠 속을 달려가려고 황홀한 백색의 얼음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글 :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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