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충, 유리멘털 깬 긍정 스트로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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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26일 페더러와 준결승]바닥치고 세계정상권 오른 정현

2016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정현(22·한국체대)은 기자에게 “이대로는 올림픽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앞두고 불참 의사를 밝힌 것이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올림픽마저 포기할 만큼 극심한 슬럼프에 허덕였다.

어릴 때부터 지면 눈물을 펑펑 쏟는 강한 승부욕을 지닌 정현. 성격도 예민했다. 라켓을 한번 바꿀 때 불과 몇 그램 차이의 무게에도 민감해하며 수없이 교체를 요구했다.


정현은 여섯 살 때 테니스를 시작했다. 테니스 지도자였던 아버지 정석진 씨와 세 살 위 형으로 역시 테니스 선수인 정홍을 따라 테니스 코트에 놀러갔다 라켓을 잡았다. 정현은 수원북중과 삼일공고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삼일공고 테니스 감독이었다.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셈이다.

일찍부터 유망주로 꼽혔던 정현은 중학교 때 스포츠매니지먼트사인 IMG의 후원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적응에 애를 먹어 귀국했다. 이후 삼일공고로 진학한 뒤 삼성증권의 후원을 받았다. 이때 그가 8강전을 끝내고 적은 ‘캡틴 보고 있나’라는 메시지의 주인공 김일순 감독을 만났다.

정현은 2014 인천 아시아경기 금메달로 병역면제를 받은 뒤 본격적으로 해외 무대에 나섰다. 19세 때 세계 랭킹을 51위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정현에 대한 상대 선수들의 견제가 심해졌다. 약점인 포핸드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불안한 서브에 발목이 잡혔다.

정현의 승부욕과 예민한 성격은 덫이 됐다. 입스(심리불안상태)가 지속되면서 라켓도 못 잡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세계 랭킹은 100위 밖으로 추락했다.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 김영미 씨는 “1000번 정도 져봐야 테니스를 알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현은 극약 처방을 내렸다. 대회 출전을 중단했다. 이후 테니스 스타 출신인 박성희 박사(심리학 전공)에게 멘털 트레이닝을 받았다. 박 박사는 “우선 생각부터 바꾸는 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정현의 스윙은 교과서적이라고 할 수 없다. 자유분방한 스윙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들의 스타일을 존중하며 간섭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체육교사를 그만두고 아들 뒷바라지에 올인했다. 물리치료사 출신인 어머니는 대회 때 꿀 등 정현이 좋아하는 음식을 싸갖고 다니며 공을 들였다.

정현은 지난해부터 손승리 코치, 네빌 고드윈 코치(남아공)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손 코치는 데이터 분석 전문가로 세밀한 성격인 정현과 손발이 잘 맞았다. 고드윈 코치는 세계 유명 선수를 길러냈으며 서브 강화에 큰 도움을 줬다.

혹독한 성장통을 극복한 그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애칭인 ‘미스터 충(Chung)’ 신드롬까지 일으키고 있다. 정현은 부진 탈출과정에서 약점이었던 예민함과 정신력 부족을 극복했다. 이제는 오히려 여유로움과 유머감각이 돋보인다. 가족의 애정, 코치와의 호흡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켰다.

호주오픈 5경기를 치르는 동안 5차례 타이브레이크에서 모두 이길 만큼 고도의 집중력과 강심장을 보였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유머 감각도 화제를 뿌렸다. 어려서부터 영어 책을 가까이하고, 지난 2년 동안 해외 투어를 돌면서도 영어 개인 과외까지 받은 덕분이다. 스스로 “속에 능구렁이가 10마리 들어 있다”고 말할 만큼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요즘은 수다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한층 밝아졌다.

여성 관객으로 경기를 지켜본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연구원 염지현 씨는 “어린 나이에 역경을 딛고 강한 선수를 꺾는 스토리가 매력적이다. 특히 여성에게 저음의 굵은 목소리와 위트 있는 인터뷰가 어필하고 있다”고 말했다.

2년 전 부진에 허덕일 때 정현은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라는 수필집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하지만 어느새 그는 세계 테니스 정복을 노릴 만큼 부쩍 커 있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정현#테니스#페더러#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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