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에 열린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마라톤에서 완주한 뒤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손명준. KBS중계화면캡처
마라톤 국가대표 손명준(22·삼성전자)에게 8월에 열린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는 리우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보다 24분가량 뒤진 2시간36분21초의 초라한 성적으로 완주한 140명 가운데 131위에 그쳤다.
“몸 상태가 안 좋아 초반부터 처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습니다. 기어서 골인하는 외국 선수들도 있었으니까요. 어이없는 기록이 나온 건 결국 제 탓이죠. 어떤 핑계도 대고 싶지 않습니다.”
함께 출전한 심종섭(25·한국전력)은 2시간42분42초로 138위를 했다. 캄보디아로 국적을 바꿔 출전한 일본 개그맨 출신 다키자키 구니아키(39)가 139위(2시간45분55초)를 하면서 “엘리트 국가대표가 개그맨과 꼴찌 경쟁을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다룬 언론 보도도 많았지만 정작 손명준은 “기사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경기를 마치자마자 귀국해 자신을 홀로 키운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레이스에 지장을 줄까 봐 주위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데 저는 바로 연락을 받았어요. 먼저 말을 안 꺼냈을 뿐이죠. 물론 너무 슬펐죠. 심리적으로도 불안했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게 핑계로 비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는 리우에서 자신이 왜 부진했는지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가장 먼저 꼽은 이유는 경기에 나서는 자세였고 그 다음은 훈련 과정이었다.
“세계기록은 2시간 3분대인데 제 최고 기록은 12분대잖아요. 뛰어 보기도 전에 ‘따라잡을 수 없는 차이’라며 움츠러들었던 것 같아요. 대표팀 훈련을 할 때부터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소속팀의 훈련 방식과 달랐으니까요. 국내에서는 무난하게 했던 식이요법도 쉽지 않았습니다. 선수촌 음식이 좋지 않았거든요. 어떤 분들은 ‘즉석밥 먹고 뛰었다’는 걸 문제 삼았던데 외국 나가면 그만한 게 없어요. 모든 선수들이 먹는 건데…. 훈련을 하면 어떤 기록이 나올지 감이 와요. 이번에는 훈련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손명준은 침체에 빠진 한국 마라톤에 혜성처럼 나타난 선수다. 건국대 4학년이던 지난해 4월 대구국제마라톤에서 처음 풀코스에 도전해 2시간 14분대의 기록으로 국내 1위를 차지했다. 10월에 뛴 두 번째 풀코스에서는 2시간 13분대를 끊었고, 올해 2월 벳푸 국제대회에서는 2시간12분34초의 국내 시즌 최고 기록으로 전체 5위에 올랐다. 풀코스를 뛸 때마다 1분씩 기록을 앞당기다 네 번째 풀코스 도전에서 무너진 게 하필이면 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은 최고의 무대죠. 하지만 12분대인 제 기록으로는 메달을 넘보기 힘든 대회입니다.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에요. 갑자기 기록을 단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차근차근 시간을 줄여 나가야죠. 내년에는 10분대를 끊고 20대 중반까지 7분대를 만들 수 있다면 기록 경쟁은 어렵더라도 순위 경쟁은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13일 제주 서귀포동아마라톤센터에서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는 손명준(앞). 그는“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의 부진을 쓴 약으로 여기고 싶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2020년 도쿄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육상단 제공 손명준은 13일부터 22일까지 제주 서귀포동아마라톤센터에서 열리는 ‘2016 마라톤·경보 합동훈련 겸 워크숍’에 참가하고 있다. 한국 육상에서 올림픽 메달을 기대할 수 있는 마라톤과 경보가 리우에서 참패한 이유를 돌아보고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김재룡 대한육상연맹 마라톤위원장(50·한국전력 감독)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자리다. 선수 60명, 지도자 20명 등 약 80명이 훈련, 평가, 강의로 이어지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큰 기대를 안 하고 왔는데 배우는 게 많네요. 사실 대한민국 마라톤 국가대표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와 닿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새삼 깨닫게 됐어요. 많은 분들이 ‘요즘 선수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하시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마라톤 선수 가운데 집안 형편이 좋은 사람 거의 없어요. 저부터 생계형 마라토너인걸요.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인생이 달라질 텐데 누가 대충 뛰겠습니까. 다만 당장은 세계 수준과 차이가 커서 엄두가 나지 않을 뿐,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다시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충북 소이초등학교 6학년 때 육상에 입문한 손명준은 육상선수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도 대학을 마쳤고, 또래에 비해 일찍 직업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육상 덕분이라고 했다.
“제가 올해 국내 랭킹 1위라고 하는데 창피합니다. 고작 12분대에 불과한걸요. 다른 선수들의 기록이 더 안 좋으니까 가능했던 거죠. 다행히 지난해부터 전반적으로 기록들이 좋아지고 있어요. 바닥을 찍었다고나 할까요. 마라톤은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감히 제가 한국 마라톤 부흥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좋은 성적을 올리면 그게 한국 마라톤 기록이 되는 거 아닌가요. 리우 올림픽은 쓰디쓴 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쓴 약을 먹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드라마를 쓰고 싶어요. 4년 전 꼴찌 경쟁을 했던 선수의 반전 드라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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