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현지 시간) 펜싱 여자 플뢰레 4강 경기를 앞둔 영국 런던 엑셀 펜싱경기장. 장내 아나운서가 관중의 환호를 유도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경기장에 어둠이 깔리고 스포트라이트가 피스트(펜싱 경기가 펼쳐지는 막대 모양의 바닥)만을 비춘다. 장엄한 배경음악과 함께 4강 첫 대결을 펼칠 남현희(31·157cm·한국)와 엘리사 디 프란치스카(30·177cm·이탈리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가 된다. 마치 프로 격투기장을 연상케 했다.
더구나 4강에 오른 4명 중 남현희를 제외한 3명 모두 이탈리아 선수. 5000여 명의 관중이 들어찬 경기장은 이미 이탈리아의 홈 분위기였다. 피스트에 선 남현희는 프란치스카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작았다. 이탈리아 관중은 “밟아버려”라며 남현희를 압박했다. 하지만 남현희는 빠르고 정확했다. 팔다리가 긴 상대를 맞아 복싱 선수를 연상케 하는 현란한 스텝을 앞세워 3라운드 1분여를 남기고 9-5까지 앞섰다. 이탈리아 관중의 침묵 사이로 “남현희 파이팅”을 외치는 한국 응원단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러나 펜싱의 본고장 유럽 관중은 동양에서 온 남현희를 가만두지 않았다. 파도타기 응원으로 프란치스카에게 힘을 보탰다. 남현희는 1분을 버티지 못하고 10-10 동점을 허용했고 서든데스제인 연장에서 통한의 끝내기 점수를 내주며 10-11로 역전패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결승에서 패했던 ‘숙적’ 발렌티나 베찰리(38·이탈리아)와의 3, 4위전도 비슷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고 연장 접전 끝에 12-13으로 졌다. 한국 여자 펜싱 사상 첫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의 2회 연속 메달 도전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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