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또 울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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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아시아 첫 女빙속 金… 남녀 500m 세계최초 동반 제패

전광판 자신의 이름 앞에 ‘1’이라는 숫자가 찍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4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아쉬움의 눈물이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올림픽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나갔다. 결과는 5위. 2명만 제치면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분해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간판 이상화(21·한국체대). 그가 17일 캐나다 밴쿠버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에서 흘린 눈물은 달랐다.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지금까지 흘린 땀이 눈물이 돼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여자 500m 1, 2차 시기 합계 76초099를 기록해 세계기록 보유자 예니 볼프(독일·76초145)를 0.046초 차로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여성으로선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부 5종목(500m, 1000m, 1500m, 3000m, 5000m)을 통틀어 사상 첫 금메달의 금자탑을 세웠다.

○ 다윗이 골리앗을 꺾다

이상화는 지난달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미디어 데이에서 “예니 볼프와 같은 조로 경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볼프는 세계기록 보유자로 지난해 각종 대회에서 볼프와 몇 차례 같은 조에 배정됐을 때 모두 졌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1차 시기에 볼프와 같은 조에 배정됐다. 다행인 것은 그가 좋아하는 아웃코스인 점뿐이었다. 출발 신호가 울리기 전 이상화는 움찔했고 심판은 그의 부정 출발을 선언했다. 이상화는 “실수였다. 하지만 오히려 볼프의 타이밍이 흐트러져 전화위복이 됐다”고 웃었다.

이상화는 초반 100m를 10초34에 끊었다. 자신의 최고 기록이었다. 기대감도 커졌다. 김관규 대표팀 감독은 경기 전 “출발이 빠른 볼프에게 초반 100m만 크게 뒤지지 않으면 해볼 만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100m까지는 볼프에 0.08초 뒤졌지만 오히려 0.06초 빨리(38초249) 결승선을 통과했다. 1차 시기를 1위로 끝낸 이상화는 2차 시기에 또 볼프와 같은 조에 편성됐다. 이상화는 초반 100m를 10초29로 주파해 1차 시기보다 빨랐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 이제는 놀랍지 않은 금메달

남자 500m에서 모태범(21·한국체대)이 금메달을 딴 뒤 이상화도 여자 500m 정상에 오르면서 한국은 당당히 스피드스케이팅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육상으로 비교하면 100m 남녀 종목을 모두 석권한 것과 같다.

유럽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을 쫓아다니며 “도대체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갑자기 세계 정상에 오른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세계선수권 1위 해도 연아 금메달에 묻혔는데…”

이승훈(22)이 남자 5000m에서 은메달을 땄을 때만 해도 이변이라고 표현했던 외신들도 이제는 비결을 묻기 시작했다. 한국이 세계 최강으로 올라서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한국보다 강하다고 생각한 중국과 일본의 표정은 그야말로 침통함 자체다. 중국 대표팀 감독은 중국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책을 받기도 했다.

○ 쇼트트랙과 피겨에 가린 서러움

이상화는 사실 금메달 후보로까지 꼽히지는 않았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여자 500m 월드컵 랭킹 3위였기에 메달 색깔이 금색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이상화는 경기 뒤 “믿기지 않는다. 내가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모태범과 이승훈 등 동기들이 앞서 메달을 목에 걸자 긴장감도 더 컸다. 이상화는 “지난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긴장감을 없애려고 평소에 잘 듣지도 않던 클래식을 듣자 태범이가 와서 ‘안하던 행동을 하냐’며 놀렸다”고 웃었다. 이상화는 평소 대표팀 오빠들에게 ‘꿀벅지’라며 놀림을 받는 굵은 허벅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모두 성실하고 악바리같이 훈련을 한 결과로 김관규 대표팀 감독은 “이상화는 남자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하면서도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금메달 비결에 대해 묻자 “그저 열심히 했다”며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도 쇼트트랙과 피겨스케이팅의 인기에 묻혀 그동안 서러웠다. 얼마 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종합 1위를 했는데도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니 묻혀버리더라. 하지만 이제 그 서러움은 모두 사라졌다”며 미소 지었다.

밴쿠버=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 다시보기 = 이상화, 한국 女빙속 사상 첫 금메달 순간




▲ 동영상 = 이상화, “오빠들과 함께한 훈련이 도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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