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통신]해발 3930m 추모탑… 영웅들은 웃고 있었다

  • 입력 2009년 4월 9일 03시 01분


박영석 대장 “남서벽서 숨진 후배 4명의 꿈 이룰 것”

“천상을 향하던 벗들이여! 험난한 벽도 칼날 같은 설릉도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던 영웅들이여.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새로운 선을 그으려던 그대들은. 아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둠조차도 느끼지 못한 눈사태로 유성처럼 사라지고 말았네. 높은 곳을, 더 험한 곳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간 그대들의 발자취는 영원하리라.”(고 오희준, 이현조 대원 추모문 중 일부)

히말라야의 깎아지른 절벽을 휘감고 돌아온 돌풍은 언덕을 거세게 휩쓸고 지나갔다. 7일 채 푸른 잎이 돋기 전인 앙상한 네팔 팡보체(해발 3930m)의 한 구릉 위. 날씨는 눈부실 정도로 청명했지만 줄지어 늘어선 네팔식 추모비는 처연했다. 그 한쪽에는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한창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한국 산악인들의 추모탑이 있었다.

1993년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숨진 남원우 안진섭 대원과 2007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오희준 이현조 대원. 이국의 낯선 바람과 햇살, 생경한 풍경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한국에서 오는 지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들아 내가 왔다. 잘 있었냐?” 짐짓 허세를 부렸지만 박영석 대장(46·골드윈코리아 이사)의 코끝은 금세 찡해졌다. 멍하니 추모탑을 바라보다 말없이 동료들의 사진을 탑에 올렸다. 사진 속의 그들은 하나같이 젊고 환하게 웃고 있다. “형, 이제 왔구나”라며 반기는 듯했다. 박 대장은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들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잃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숨진 날짜는 모두 5월 16일.

“아,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섬뜩하기도 했어요. 하나 둘도 아니고 형제 같은 후배 4명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보냈으니….” 박 대장의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서울에서 가져온 황태 네 마리가 제사상에 올랐다. 갓 지은 쌀밥과 쇠고깃국도 차려졌다. 귤과 사과를 다듬어 오롯이 그릇에 담았다. 술은 네팔식 막걸리인 ‘창’으로 올렸다. 멀건 술잔에 밥알이 동동 떠 있다. 차례로 절을 하고 탑 주변에 술과 음식을 뿌렸다. 어디서 왔는지 까마귀 두 마리가 내려앉아 음식을 바삐 넘긴다.

“그래, (까마귀야) 많이 먹고 좋은 곳으로들 보내줘라.” 박 대장은 팔을 휘휘 저었다. 원정대는 그 언덕에서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동료 4명을 잃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내디뎠다. 정상 공격은 마치 태엽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이번에도 5월 10일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원정대의 어깨 너머 저 멀리 고인들이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에베레스트 봉우리가 보였다. 길을 잃지 말라는 듯 정상 부근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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