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WBC스펙트럼] 숨은 영웅 정현욱을 아십니까?

  • 입력 2009년 3월 11일 07시 57분


혹자는 그를 두고 ‘마당쇠’라 부릅니다. 누군가는 ‘노예’라고도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등판해 허드렛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 앞에 수식어가 하나 더 붙어야겠습니다. ‘국민 마당쇠’라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의 든든한 허리로 떠오른 정현욱(31·삼성·사진) 얘기입니다.

지난해 12월 WBC대표팀 1차 엔트리 45명의 명단이 발표될 때 그의 이름 석자가 포함됐습니다. 소속팀 삼성조차, 심지어 그와 가족들조차 “그래도 45명 안에 낀 게 어디냐. 출세했다”며 웃어버렸습니다.

‘다음엔 빠지겠지, 다음엔 걸러지겠지….’ 그런데 웬일인지 엔트리를 추리고 거르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 이름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투수진 중 탈락 1호’로 여겼지만 박찬호가 불참하면서, 김병현이 여권을 잃어버리면서,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자신의 능력치를 불신했지만, 믿음으로 무장한 김인식 감독은 그를 간택했습니다. 그때도 그는 “용케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팀 13명의 투수 중 13번째 투수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면서 “이것도 경험인데 중국전에나 한번 등판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예상과는 다른 시나리오가 그 앞에, 대한민국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일본에 14점이나 내주고 콜드게임을 당한 7일 도쿄돔에서 그는 홀로 씩씩하게 던졌습니다. ‘일본킬러’ 김광현이 무너진 뒤 마운드에 서서 4타자를 완벽하게 처리하고 내려왔습니다.

김인식 감독은 그 기억을 되살려 ‘3.9 일본대첩’에 그를 다시 중용했습니다. 이번에는 승부처였습니다. 봉중근이 6회 1사에서 한계투구수에 걸렸을 때 마운드를 이어받아 1.2이닝 무실점으로 승리의 징검다리를 놓았습니다. 봉중근이 영웅이었다면 그는 숨은 영웅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어지간한 야구팬 아니고는 제 이름을 알겠습니까. 쟤가 이 중요한 순간에 왜 나오나 했겠죠. 일본에서도 김광현 류현진은 알아도 저를 어떻게 알겠어요. 원없이 던져보자는 생각으로 빠른 볼만 던졌죠. 한국타자들이었으면 제 직구만 노리고 왔을 텐데 일본타자들은 이상하게 안 치더라고요. 2라운드에서도 맞을지언정 내 공은 던져보고 가고 싶어요.”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국민 마당쇠’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습니다. 그의 심장이 뛰는 왼쪽가슴에는 태극마크가 선명했습니다.

피닉스(미 애리조나)|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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