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95는 사랑입니다”] 호주교포 박종암씨

  • 입력 2007년 2월 27일 02시 52분


1972년 동아마라톤 참가 이후 35년 만에 다음 달 18일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할 예정인 박종암 씨가 대회에 앞서 청계천을 달리고 있다. 박 씨는 산재사고로 발가락 전부를 포함한 오른발을 10cm 절단했지만 5년간의 재활치료를 거쳐 걷는 것은 물론 마라톤에도 참가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김재명 기자
1972년 동아마라톤 참가 이후 35년 만에 다음 달 18일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할 예정인 박종암 씨가 대회에 앞서 청계천을 달리고 있다. 박 씨는 산재사고로 발가락 전부를 포함한 오른발을 10cm 절단했지만 5년간의 재활치료를 거쳐 걷는 것은 물론 마라톤에도 참가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김재명 기자
박종암 씨의 운동화는 일반 마라토너의 운동화와 큰 차이가 있다. 오른발 사이즈는 190mm이고 왼발은 290mm로 무려 10cm나 차이가 난다. 이 운동화는 박 씨가 스포츠용품전문업체에 의뢰해 제작됐다.
박종암 씨의 운동화는 일반 마라토너의 운동화와 큰 차이가 있다. 오른발 사이즈는 190mm이고 왼발은 290mm로 무려 10cm나 차이가 난다. 이 운동화는 박 씨가 스포츠용품전문업체에 의뢰해 제작됐다.
‘달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2007 서울국제마라톤대회.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 씨는 “남을 위해 뛸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 아니냐”고 말한다. 전영한 기자
‘달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2007 서울국제마라톤대회.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 씨는 “남을 위해 뛸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 아니냐”고 말한다. 전영한 기자
“용기 내세요… 다섯 발가락 없이도 달려요”

《‘42.195는 사랑입니다.’ 3월 18일 열리는 2007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본격적인 ‘나눔 마라톤’이다. 2만5000여 명의 대회 참가자는 물론 참가자의 후원자를 비롯해 누구나 기부금을 통해 자선에 동참할 수 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모인 기부금은 세계적인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을 통해 4가지 사업(국내 결식사업, 교육문화사업, 아프리카 식수 공급 및 에이즈 예방치료사업)에 쓰인다. 대회 본부는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눔 마라톤 홈페이지(www.love42195.org)를 통해 사랑의 실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제 몸의 10cm를 잃었지만 나눔과 봉사란 단어가 제 다섯 발가락을 대신하고 있어요.”

1972년 동아마라톤대회 참가 이후 35년 만에 3월 18일 서울에서 열리는 ‘2007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 다시 참가하는 호주 교포 박종암(55) 씨는 마라톤을 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키 181cm의 건장한 체구였다.

고등학생 때 전국육상선수권대회 5000m 경기에 출전했을 정도로 육상에 소질이 있었던 박 씨는 마라톤도 좋아해 풀코스만 16번을 완주했다.

하지만 지금의 박 씨는 오른발이 발가락을 포함해 3분의 1가량 절단된 2급 산업재해 장애인이다. 그의 왼쪽 운동화 사이즈는 290mm이지만 오른쪽은 190mm다.

박 씨는 1981년 호주로 기술이민을 가 다국적 정유회사에 근무하면서 현장 공사 감독을 담당했다. 육상선수로 활동했고 직장에서도 축구선수로 활동하며 누구보다 건강했던 박 씨는 2000년 공사 현장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수십 t의 유조탱크를 들어올리던 크레인 기사에게 무전기로 지시를 내리던 박 씨는 “끌어올리라”는 말 대신 실수로 “내리라”고 말했다. 순간 박 씨의 머리 위에 있던 탱크는 박 씨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이 사고로 박 씨의 오른발이 깔렸고, 동료들이 6시간의 구조 활동 끝에 그를 간신히 끌어냈지만 박 씨의 오른쪽 발가락뼈는 산산이 부서져 접합수술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의사는 그의 발가락 전부를 잘라야만 했다.

그 후에도 세균 감염으로 4차례나 추가로 잘라냈다.

박 씨는 “주치의가 재활치료를 받아도 목발이나 지팡이가 있어야지만 걸을 수 있다고 했다”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쳐왔는지 절망하며 매일 밤 베개를 눈물로 적셨다”고 회고했다.

우울증에 걸려 사람을 만나기조차 꺼렸던 박 씨에게 어느 날 아내가 성당에서 함께 무료 급식 봉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거동조차 불편한 그였지만 아내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봉사활동에서 자신보다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접하면서 이들에 비해 자신의 장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씨는 사고 이후 수중치료, 산악등반 등 세상에 알려진 모든 재활훈련을 받으며 휠체어에서 목발로, 목발에서 지팡이로 점점 호전됐고, 마침내 재활치료 5년 만에 지팡이가 없어도 일반인과 똑같이 걸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시는 일반인처럼 걸을 수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전 지금 걷고 뛰고 이렇게 마라톤까지 할 수 있답니다. 극복 의지만 있다면 기적을 이룰 수 있고,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보조기구 없이 걷게 되면서 뛰는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박 씨는 1년간 또다시 다리근육강화 운동을 계속해 지금은 겉으로 보기에 일반인과 다름없이 뛸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보통 사람의 경우 몸 전체의 1%에 해당하는 새끼발가락만 없어도 걷기가 힘들어 절뚝거리지만 박 씨는 자신의 장애를 의지로 극복해 낸 것.

“이번 동아마라톤에서는 기록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저와 비슷한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끝까지 완주할 생각입니다.”

박 씨는 다음 달 1일부터 15일까지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장애인 돕기 기금 마련을 위한 달리기 행사를 계획했다.

호주에서 엔지니어링회사를 운영하며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박 씨는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부터 준비를 시작했고 21일 한국을 찾았다.

행사 전 봉사단체에 730여만 원을 기탁한 박 씨는 15일간 16개 도시를 뛰거나 자전거로 달리면서 모금운동을 펼친다.

그는 매년 한국에 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전국 달리기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사랑의 기금 운용할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한비야 씨

“정말 뜻 깊은 대회… 남을 위해 뛰는것 너무 멋져요”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49) 씨는 “이번 마라톤이야말로 정말 뜻 깊은 대회가 될 것”이라며 반색을 했다.

“1996년 알래스카를 여행할 때 어느 동네에서 단축 마라톤을 했는데 그게 자선 마라톤이었어요. 서울국제마라톤 얘기를 듣고 그때 일이 떠올랐죠. 아, 우리도 세계적인 흐름에 동참하는구나 싶어서요. 남을 위해 뛸 수 있다는 거 참 멋진 일 아닌가요.”

1993년 홍보회사를 그만두고 7년간 세계 곳곳을 바람처럼 돌아다녔고 그때의 경험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지 여행전문가로 유명해진 한 씨. 그는 세계의 외진 곳곳에서 가난으로 죽어 가는 아이들을 보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2001년 월드비전에 몸을 담았다.

요즘도 한 씨는 ‘바람처럼’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제 그 말뜻은 바뀌었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할 때 쓰는 바람이다. 그가 바라는 건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는 돈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면 깨끗한 물과 밥, 소중한 약으로 변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단돈 만 원의 힘은 정말 대단합니다.”

인터뷰용 사진을 찍는 시간. 그는 사진기자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나오도록 해 달라고 이것저것 부탁했다. 인상이 좋지 않으면 기부하려다가도 그만둔다고. 구호 현장에서도 프로지만 돈을 모으는 일에도 프로 냄새가 물씬 풍긴다.

달리는 사람의 심장이 박동치는 것처럼 누군가를 기꺼이 돕는 사람의 심장도 뛴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죽어 가는 누군가의 심장도 다시 뛸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서울국제마라톤대회는 마라톤 그 이상의 대회다.

한 씨는 여행을 하며 40kg이 넘는 배낭을 줄곧 메고 다닌 탓에 무릎이 좋지 않다. 이번 대회에서 직접 뛰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대회가 무척 기다려진다고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후원 문의 월드비전 02-2078-7000, www.worldvision.or.kr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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