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부천시 소사구 소새울역 인근 도로에서 지난달 13일 한 노인이 횡단보도가 아닌 곳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이곳은 보행자가 자주 이용하는 시설이 마주 보고 있지만 가까운 횡단보도도 70m 넘게 떨어져 있어 무단 횡단하는 노인이 많았다. 부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경기 부천시 소사구 소새울역 인근의 한 골목길. 지난달 13일 오후 손에 장바구니를 든 이영석 씨(82)는 양옆을 살피더니 왕복 2차로 도로를 가로 질러 건넜다. 횡단보도를 두고 무단횡단한 이유를 묻자 그는 “저 먼 횡단보도 까지 어느 세월에 갑니까”라고 답했다.
이곳은 2차로와 이면도로에서 나오는 차량이 만나는 신호등 없는 ‘T자형 삼지교차로’였다. 골목 안쪽에는 편의점과 식당, 미용실이 밀집했고 맞은편은 빌라촌이었다. 보행자가 많은 곳이지만, 주민이 자주 오가는 편의점 앞에서 가장 가까운 횡단보도는 70m 넘게 떨어져 있었다. 길을 건넜다가 다시 목적지까지 돌아오는 동선까지 고려하면 고령층에게는 아득한 우회로다.
● 2시간 동안 100명이 무단횡단
위험천만한 횡단은 끊이지 않았다.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 장효석 연구원과 함께 2시간 동안 현장을 관찰한 결과, 시간당 약 50명이 횡단보도가 아닌 차로를 그대로 건넜다. 이들 중 약 90%는 고령층이었다. 비교적 걸음이 빠른 젊은 층은 멀더라도 횡단보도 로 우회했지만, 노인들은 편의점과 빌라 사이의 ‘최단 거리’를 택했다. 같은 시간 차량 통행량은 시간당 300대 수준이었다.
노인들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엄모 씨(70)는 “횡단보도가 너무 멀다 보니 급하면 그냥 뛰게 된다”고 했다. 일부는 횡단보도가 어딨는지 알지 못했다. 아찔하게 승합차를 피한 정모 씨(84)는 “여기에 횡단보도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걸음 속도를 과신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모 씨(68)는 “차가 오기 전에 충분히 건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발을 떼게 된다”고 했다. 일부 노인은 “내가 걸음이 느리니까 차가 알아서 비켜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지역은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 분석 결과 무단횡단 사고가 실제로 발생한 지역 중에서도 ‘보행 수요는 많지만 횡단보도가 동선과 어긋난’ 대표적인 위험 도로였다. 노인들에게는 수십 m의 우회로가 단순한 불편을 넘어 무단횡단을 선택하게 하는 물리적 장벽이 된다는 의미다. 연구소가 지난해 말 기준 자사에 접수된 무단횡단 사고를 분석한 결과, 17개 시도 가운데 인구 10만 명당 무단횡단 사고 발생률은 전북과 광주, 부산, 경기 순으로 높았다.
● ‘100m 제한’에 막힌 횡단보도 설치
이 같은 위험이 전국 생활도로 곳곳에서 방치되고 있다. 경찰청과 한국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고령 보행자 교통사고는 2021년 9893건에서 지난해 1만1498건으로 4년 새 16.2% 증가했다. 같은 기간 사망자는 601명에서 619명으로, 부상자는 9423명에서 1만1059명으로 늘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생활도로의 보행 안전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문제는 현행 규정상 횡단보도를 더 촘촘하게 설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횡단보도를 설치할 땐 이미 설치된 횡단보도와 일정 거리를 둬야 한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이나 노인보호구역(실버존) 등을 비롯해 보행 안전을 위해 필요성이 인정되는 일부 구간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생활도로는 100m, 그 외 도로는 200m 이내에 횡단보도를 추가로 설치할 수 없다.그러나 부천 소새울역 인근처럼 기존 횡단보도와 100m 안팎의 애매한 거리에 있는 곳은 실제 통행 수요가 많더라도 예외 적용 여부를 따져야 해 신설까지 이어지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차량 흐름을 우선시한 결과다. 차가 너무 자주 멈추지 않게 하려는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다 보니 보행 약자는 뒤로 밀려난 것이다. 특히 고령층이 많이 사는 주거지와 병원, 시장, 버스정류장 등 생활 목적지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곳에서는 무단횡단이 쉴 새 없이 벌어지게 된다.
● “노인 밀집 구역만이라도 빗장 풀어야”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기준이 고령 보행자의 생활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고령층은 보행 속도가 느리고 이동 부담이 커 최단 거리로 이동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횡단보도 간격 기준은 주로 차량 흐름과 중복 설치 방지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장효석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고령층은 보행 속도가 느리고 체력적 한계가 있어 최단 거리 동선을 선호하고, 횡단보도의 위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따라서 빌라와 편의점, 버스정류장처럼 보행 수요가 많은 생활도로에서는 횡단보도를 더욱 적극적으로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00m 내 중복 설치 제한’ 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보행 수요와 사고 위험을 함께 따져 횡단보도 추가 설치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 연구원은 “차량 흐름 문제로 횡단보도 추가 설치하기가 어렵다면 고령 보행자가 많은 지점에만 차량이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도록 유도하는 교통안전 시설을 보강할 수도 있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권구용 사회부 기자 9dragon@donga.com ▽김윤진(국제부) 임유나(산업2부) 주현우(경제부) 최효정(사회부) 한채연(산업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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