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난민’ 갈길 먼 존엄한 죽음]
‘원정 임종’ 떠나는 지방 노인들
충북-충남-경남도 ‘가정형’ 1곳뿐… ‘의료 취약지’가 곧 ‘임종 취약지’로
수도권 몰려 수개월 대기 사례도
“지역병원서 임종기 환자 관리하고, 호스피스-상급병원 연계 체계 필요”
서울 자택서 건강관리… 호스피스 쏠린 수도권
지난달 30일 서울성모병원의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왼쪽)가 서울 강남구의 한 자택을 방문해 폐암 말기 환자인 박인호 씨(94)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있다. 서울에 사는 박 씨가 집에서 생애 말기를 보내는 것과 달리 호스피스 인프라가 열악한 지방에서는 임종기 환자들이 인근 대도시나 수도권으로 ‘원정 임종’을 떠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우리 아저씨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내가 밥해주고, 씻겨주는 거 말고는 해줄 게 없능기라. 끝까지 집에 있겠다고 고집하던 양반이 병원에서 눈을 감았제.”
지난달 28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경로회관에서 만난 서수연 씨(76)는 5개월 전 숨진 남편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3년 전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서 씨의 남편은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임종 직전에 병원을 찾았다. 청도군 일대에는 의료진이 자택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완화해주는 ‘가정형 호스피스’도, 방문 의료를 제공하는 재택의료센터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도는 사단법인 ‘웰다잉문화운동’이 실시한 ‘전국 웰다잉지수’ 조사에서 강원 양양군, 전남 고흥군 등과 함께 존엄한 죽음을 위한 인프라가 가장 취약한 곳으로 꼽혔다. 동상리 주민 김금여 씨(82)는 “주위 암 걸린 사람들이 대구, 서울에 있는 병원에 많이 간다”며 “마지막까지 타지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병원이나 시설이 아니라 ‘내 집에서 늙고 죽을 권리’가 갈수록 강조되고 있지만 전남, 경북 등은 여전히 가정형 호스피스 기관이 전무하다. 전문가들은 수도권과 지방의 의료 격차가 ‘죽음의 질’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 가정형 호스피스, 전남·경북은 ‘0곳’
4일 중앙호스피스센터에 따르면 전국 호스피스 기관 126곳 가운데 47.6%(60곳)가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몰려 있다. 이 가운데 환자가 병원에 머물며 24시간 돌봄 서비스를 받는 ‘입원형 호스피스’는 전국 1910개 병상 중 50.5%(963개)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일반병동 입원 환자에게 완화의료 자문을 해주는 ‘자문형 호스피스’는 60%(27곳)가 수도권에 쏠려 있다.
특히 임종기 환자들이 선호하는 가정형 호스피스의 지역별 격차가 두드러진다. 전체 40곳 중 47.5%(19곳)가 수도권에 몰린 반면에 경북, 전남에는 한 곳도 없다. 충북, 충남, 경남 등도 한 곳에 불과하다.
이렇다 보니 살던 곳에서 임종 준비를 하기가 어려운 지방의 노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인근 대도시나 수도권으로 향한다. 길민정 서울북부병원 완화의료팀 사회복지사는 “서울에 사는 딸이 전남 신안군의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서 가정형 호스피스를 받게 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대형 병원과 공공병원이 많은 수도권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폐암 말기인 박인호 씨(94)는 지난해 12월 퇴원 후 집에서 가정형 호스피스를 받고 있다. 지난달 30일에도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가 박 씨의 서울 강남구 자택을 찾아 혈압과 맥박 등을 검사하고 있었다. 박 씨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사회복지사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상담해주고, 자원봉사자가 찾아와 이발도 해준다. 아들 박영민 씨(66)는 “아버지가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만족해하신다. 병원에 계실 때보다 훨씬 편안해지셨다”고 했다.
● ‘의료 취약지’가 ‘임종 취약지’로
전문가들은 일반 환자들의 수도권 쏠림이 지역 호스피스 인프라를 더 취약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환자가 떠나면서 지역 의료기관 운영이 어려워지고, 적절한 완화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힘들어져 말기 환자들이 임종을 위해 다시 수도권을 찾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청도군에서 10년 넘게 진료해 온 현상헌 해동연합의원 원장은 “예전에는 큰 병이 생기면 가까운 대구 병원으로 갔는데 요즘은 만성질환이나 중증이 아니어도 곧바로 서울로 간다”며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지방 병원이 호스피스까지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수도권으로 호스피스 수요가 몰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수개월을 대기해야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제때 호스피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지방의 임종기 환자들은 부득이하게 지역 요양시설로 눈을 돌리지만 이마저도 환영받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한소현 한국노인장기요양기관협회 부장은 “요양기관 대부분이 극심한 통증으로 힘겨워하는 임종기 환자 수용을 부담스러워한다”고 전했다. 청도에서 18년째 운영 중인 한 요양병원 관계자는 “항암 치료 중인 암 환자만 가려 받는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대형 병원이 많지 않은 의료 취약지일수록 1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강화해 존엄한 죽음을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기철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학과 교수는 “지역병원이 재택의료 등을 통해 말기 환자의 건강 관리와 통증 조절을 맡고, 위중한 경우 호스피스 병동이나 상급병원으로 연계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호스피스 수가를 높여 의료기관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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