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집값 급등기 시절, 아파트 청약 분야 유명 강사의 설명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강사는 청약 당첨 비법보다 ‘공급 물량’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급이 넘치는 곳에 청약해 당첨되면 나중에 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에 집을 팔아야 할 수도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강의 말미에는 “절대 청약하면 안 되는 지역”이라며 공급 과잉 예상 도시를 꼽았는데,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준공 후 미분양’으로 허덕이고 있다.
지금의 지방 미분양 문제는 건설업계에서 ‘회색 코뿔소’를 대비하지 못해 생긴 문제다. 건설사들은 집값 급등기 분양만 하면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사업장을 늘렸다. 땅값 상승, 인구 고령화 등 위기 징후가 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회색 코뿔소가 다가올 때 땅이 흔들리고 소음이 발생하는 것처럼 여러 위험 신호가 있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 결과가 청약 신청자가 전무한 ‘제로(0)’ 단지와 10여 년 만에 최대로 치솟은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이었다.
정부는 19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통해 지방 준공 후 미분양 3000채를 매입하기로 했다. 공적자금 성격을 띠는 LH 예산으로 건설사 악성 재고를 사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도 건설업계는 세제, 금융 지원 등 주택 구입 유인책이 빠졌다며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건설업계의 이런 요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주택 경기에 따라 바뀌는 건설사의 행태 때문이다. 집값 상승기 이익은 오로지 건설사와 시행사 몫이었다. 과잉 공급을 우려해 신규 주택 건설 승인을 억제하려 하면 “자유시장 경제에서 돈 벌 기회를 왜 막느냐”며 항의했다. 그러다 지금처럼 미분양으로 공사비를 회수하지 못하는 곳이 늘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부 도움과 구제를 요청하고 있다. 이익 추구만 있고 책임은 회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5월 중 지방 건설 경기 상황을 보고 3단계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의 구체적인 적용 범위, 비율 등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건설업계와 정치권이 요구한 대출 규제 완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후속 대책에는 회색 코뿔소를 무시한 ‘건설사 살리기’가 아니라 ‘지역 건설경기 활성화’에 부합하는 내용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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