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꼼짝마”… 땅속까지 쫓아가는 사기꾼들의 저승사자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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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뛰는’ 사기범 위에 ‘나는’ 사기전담반
수배만 12번… ‘미라 중의 미라’
단서 하나들고 대구 달려간 형사들
뛰는 사기꾼 위에 나는 전담반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숙박업소 밀집 지역에서 마포경찰서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 김찬조 반장과 최재혁 수사관이 차량을 
이용한 잠복 노하우를 설명하고 있다. 장기 도피 수배자들을 전담해 추적하는 이들에게 잠복은 일상이다. 이들이 탄 차량 앞 유리는 
수배자가 잠복 여부를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짙게 선팅이 돼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숙박업소 밀집 지역에서 마포경찰서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 김찬조 반장과 최재혁 수사관이 차량을 이용한 잠복 노하우를 설명하고 있다. 장기 도피 수배자들을 전담해 추적하는 이들에게 잠복은 일상이다. 이들이 탄 차량 앞 유리는 수배자가 잠복 여부를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짙게 선팅이 돼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경찰 공식 직제에는 없는 조직이 있다.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이라 불리는 이들은 이름 그대로 수많은 피해자를 울리고 수년째 도망 다니는 악질 사기범들의 뒤를 쫓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힘겨운 여건에도 올 1월부터 장기 수배자 46명을 잡아들인 서울 마포서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을 만나 봤다.》




“어디서 담배 냄새 나는 것 같지 않아?”

지난해 12월 오후 11시경 인천 미추홀구의 한 빌라.

수배자 A 씨를 붙잡기 위해 은신처 수색에 나선 서울 마포경찰서 김찬조 반장(39)의 ‘촉’이 발동했다. 아무도 없는 빌라 베란다에서 미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그 순간 위층 베란다로 이어지는 배관이 김 반장 눈에 들어왔다. ‘젊은 남성이면 어렵지 않게 타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빌라 관리실에 위층에 입주자가 있는지 문의했더니 ‘공실’이란 답을 들었다. 관리실 도움을 얻어 빈집에 잠입한 김 반장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담배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이내 다다른 안방 문은 잠겨 있었지만, 살짝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굳게 잠긴 방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기를 40여 분. “다 끝났다. 이제 나오라”는 김 반장의 말에 포기한 A 씨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마포서를 비롯해 4개 수사기관에서 수배를 내리고 추적해 왔던 그의 도주는 약 5개월 만에 끝이 났다.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현장에 가도 항상 변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현장 수사관의 ‘촉’이죠. 물론 그건 다양한 경험과 실전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서울 마포서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 김 반장이 이끌고 있는 팀 이름이다. ‘사기추적전담반’이라고도 불리는 이 팀은 사실 직제에는 없는 비공식 조직이다. 주로 수사 도중에 종적을 감춰 수배가 내려진 사기 혐의 피의자들을 뒤쫓는다.

물론 우선순위는 있다. 피해 금액이 크거나 피해자가 많은 사건의 수배자 가운데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거나 신병 확보가 시급한 경우를 급선무로 한다. 마포서 전담반은 김 반장과 최재혁 수사관(34) 둘뿐이지만, 1월부터 46명의 수배자를 붙잡았다. 이들이 사라져 수사가 중단됐던 사건 78건이 다시 진행됐다.

2012년 선보인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은 현재 서울경찰청 산하 31개 경찰서 가운데 20여 곳에서 운영하고 있다. ‘악성 사기범은 끝까지 추적해 반드시 잡는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오늘도 전담반은 쉬지 않고 수배자를 쫓고 있다.

○ “우리는 ‘미라’를 쫓고 있다”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이 쫓는 장기도주 수배자 중에는 경찰이 ‘미라’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여러 경찰서에서 수배 중이며, 몇 년째 수사망을 피해 다니는 이들이다. 경찰 관계자는 “미라들은 도피 중에도 계속해서 사기 범죄를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 하루라도 일찍 붙잡아야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김 반장이 붙잡은 B 씨는 ‘최상급 미라’라고 할 수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B 씨는 2013년경 지인에게 소개받은 피해자들에게 “명의를 빌려주면 대출받아 화물차를 구입하고 렌트 수익을 올려 할부금을 갚아주겠다”고 꼬드겼다. 명의를 빌려주는 즉시 500만 원도 주고, 나중에는 화물차를 팔아 대금의 절반도 나눠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B 씨는 애초에 화물차를 사지도 않았으며, 피해자들 명의로 수천만 원씩 대출을 받아 가로채기도 했다.

같은 수법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울린 B 씨는 재판에 넘겨진 뒤 두 차례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사기를 저질러 마포서와 대구경찰서 등 12곳에서 수배를 받았다. 지난해까지 그의 도피는 7년째 이어졌다.

지난해 말 마포서 전담반은 B 씨를 검거 제1순위 가운데 한 명으로 올렸다. 김 반장은 “종적을 감춘 사이 그가 저지른 사건들의 공소시효가 하나둘씩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포폰과 현금만 사용해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거처를 수시로 옮겨 다니는 B 씨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담반은 갖은 노력 끝에 B 씨에게 사기를 당한 한 피해자를 찾아냈다. 그는 “대구 달성군에 있는 전자담배가게 앞에서 B 씨와 두세 번 접선했다”는 단서를 건넸다. 김 반장은 “이런 한마디를 듣기 위해 수십, 수백 명을 접선하는 것”이라며 “단서를 찾자마자 무작정 대구로 향했다”고 했다.

전담반은 달성군에 있는 전자담배가게 20여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피해자에게 사진을 보내 “이 가게가 맞느냐”고 확인하자 한 곳을 지목했다. 해당 가게 주변에 주차한 차량 수십 대의 번호판을 일일이 조회한 김 반장은 낡은 흰색 승용차 한 대가 B 씨 부인 소유라는 걸 알아냈다.

그건 단지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끝을 알 수 없는 잠복이 이어졌다. 김 반장은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B 씨의 오래전 면허증 사진을 꺼내 구석구석 눈에 담았다.

“수시로 사진을 꺼내 보는 건 ‘살이 많이 빠지진 않았을까, 오히려 살이 쪘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계속 상상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휴대전화에 가족보다 수배자 사진이 더 많겠어요.”

김 반장의 노력은 하늘에 닿았다. 며칠째 잠복하던 전담반 앞에 드디어 B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스크를 착용해 얼굴 전체를 볼 순 없었지만 날카로운 눈매는 그대로였다. “B 씨 맞으시죠?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단호한 전담반 앞에 신출귀몰했던 B 씨도 체념한 채 순순히 따라나섰다.

○ “감사 인사 한마디에 피곤 싹 풀려”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여인숙에서 마포경찰서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 최재혁 수사관(오른쪽)이 수배자 탐문을 하고 있다.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여인숙에서 마포경찰서 악성사기범검거전담반 최재혁 수사관(오른쪽)이 수배자 탐문을 하고 있다.
전담반이 항상 장기도주 수배자만 쫓는 건 아니다. 다른 수사부서의 요청을 받아 급히 검거해야 할 피의자를 추적할 때도 적지 않다.

6월 마포구의 한 공사현장에서 지게차를 몰던 C 씨는 후진 중 80대 여성을 치어 숨지게 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그는 사고 직후 피해자가 이송된 병원을 찾아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는 돌연 자취를 감춰버렸다.

C 씨는 도주 직전 최 수사관과 통화하며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최 수사관은 “피의자 신병을 안전하게 확보해 올바른 처벌을 받도록 인도하는 것도 전담반의 역할”이라며 “즉시 C 씨의 휴대전화를 위치 추적했다”고 했다.

C 씨는 도주 직후 휴대전화를 새로 개통했다. 새로 개통한 전화신호는 전북 부안에서 포착됐다. 출장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부안으로 간 전담반은 모텔과 고시원 약 60곳을 탐문했다. 길거리 폐쇄회로(CC)TV와 시내버스 블랙박스 70여 개를 뜯어봤다.

최 수사관은 “C 씨는 가방에 즉석밥과 물만 가지고 다니며 노숙을 했다고 한다”며 “숙박업소도 씻을 때만 잠시 이용하고 이 틈을 타 머리를 빡빡 미는 등 추적에 혼선을 줬다”고 전했다.

전담반은 10여 일간 탐문과 잠복 끝에 폐가 상태로 방치된 C 씨의 고향집에서 그를 찾아냈다. 갑작스러운 출장에 옷 한 벌로 버티고 패스트푸드로 삼시 세끼를 때웠던 전담반은 폐가 창문 너머로 누워 있는 C 씨의 두 발을 발견한 순간 피로는 눈 녹듯 사라졌다고 한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수배자가 장소를 이동하면 그동안 해온 탐문과 잠복을 그대로 다시 반복해야 해요. 참고 버티는 만큼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 추적 수사의 묘미죠.”

필사적인 수배자들을 쫓는 게 일상이다 보니 전담반도 노하우가 늘어났다. 중국집 배달원에게 음식이 잘못 배달된 것처럼 연기를 부탁하거나 직접 방문판매원으로 위장해 연기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수배자의 모바일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수시로 확인하며 개를 키우지는 않는지, 동거인이 있는지, 사진의 배경은 어딘지 꼼꼼히 살펴본다.

땅에 떨어진 담배꽁초 하나도, 모텔 방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의 길이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편집증은 직업병이 됐다. 김 반장은 “가끔 수배자들의 스토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남모를 고충 역시 많다. 수배자의 은신처 문을 두드리기 전에는 극도의 긴장 상태가 이어진다. ‘혹시 흉기를 들고 숨어 있지는 않을까?’ ‘문을 너무 성급히 열면 창문으로 뛰어내리지는 않을까?’ 찰나의 순간에도 오만 가지 걱정이 뇌리를 스친다. 모텔 문을 강제로 뜯었다가 허탕을 치고 자비로 수리비를 물어준 적도 허다하다. 한번 출장을 떠나면 이삼 일은 기본, 길게는 열흘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흔해 가족 앞에선 항상 죄인이 된다.

고된 추적을 버티는 힘은 피해자들이 건네는 감사 인사 한마디다. 피해자들은 금전적 여유가 없어 절박한 이들이 많다. 김 반장과 최 수사관은 “피해 금액을 변제받지 못해 피폐해져가는 피해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며 “검거 뒤 피해자가 보내온 감사 문자에 그간의 고충을 잊고 마음을 다잡는다”고 전했다.

“사기를 치고 돈을 빼돌린 수배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돈을 탕진하며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을 겁니다. 피눈물 흘리는 피해자는 물론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성과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긴급생활비 확인 주소’ 누르지 마세요… 돈 빼가는 문자피싱 극성
비대면사회 틈타 사이버범죄 급증


“긴급생활비 지원사업이 접수됐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사이버범죄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문자메시지와 함께 악성바이러스를 심은 인터넷주소(URL)를 함께 보내는 ‘스미싱(문자메시지 피싱)’도 교묘하게 수법을 바꿨다.

기존에는 택배 조회나 결혼식 초대장을 가장했다면 최근엔 긴급생활비 지원 조회, 확진자 정보 조회 등 코로나19와 관련된 문자메시지로 피해자들을 울리고 있다. 생계가 막막한 자영업자가 ‘긴급생활비’라는 말에 속아 URL을 누르면 악성프로그램이 설치돼 개인정보를 빼내는 수법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소액결제가 이뤄져 금전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언택트(비대면) 사회’로 바뀐 일상도 사이버범죄에 노출될 위험성을 키우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 이후인 지난해 사이버범죄 발생 건수는 23만4098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과 비교해 약 29.7%나 급증했다.

가장 큰 폭으로 늘어난 건 중고거래 사기, 사이버금융범죄 등 사이버 피싱 범죄다. 지난해 발생한 사이버범죄 가운데 85.3%를 차지하는 19만9594건의 피해가 발생했다. 전년 대비 31.4% 늘었다. 국가수사본부는 “인터넷 비대면 중고거래 플랫폼이 확장되고 거래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이를 악용한 사기 수법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자 비대면 업무 환경을 노린 ‘랜섬웨어’ 피해 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랜섬웨어란 기업 서버에 악성 코드를 심고 데이터를 전부 빼낸 뒤 수억 원대 돈을 요구하는 사이버범죄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랜섬웨어 피해 건수는 2019년 39건에서 지난해 127건으로 3배 넘게 늘었다.

이형택 한국랜섬웨어침해대응센터장은 “재택근무가 보편화된 지난해부터 랜섬웨어 피해를 입은 중소·중견기업 등이 늘어났다”며 “보안이 취약한 개인컴퓨터(PC)에 악성코드를 심은 뒤 해당 PC가 회사 서버에 접속할 때 기업 정보를 탈취하는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이 센터장은 “특히 비용 문제로 보안·백신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았던 중소기업의 피해가 컸다”며 “개개인은 정기적인 업무파일 백업을 하고, 기업은 선제적으로 보안을 강화해야 랜섬웨어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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