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때 유일한 혈육 잃은 할아버지, 목놓아 울면서 한 걱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17일 21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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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한 유가족 장하연 할아버지가 묘비와 영정사진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한 유가족 장하연 할아버지가 묘비와 영정사진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유일한 혈육인 내가 죽으면 제사는 누가 지낼까 걱정입니다.”

하루종일 궂은 비가 주룩주룩 내린 17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은 장하연 할아버지(77·사진)가 고개를 숙인 채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유일한 혈육인 형 하일 씨(당시 38세)를 잃었다.

형제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이다. 1949년 남으로 내려와 가족은 서울에 삶의 터전을 근근이 잡았다. 하지만 1년 후 6·25전쟁이 나고 전남 곡성으로 피난왔다. 힘든 피난살이에 부모와 여동생을 잃고 할아버지 형제만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두 살 터울의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1980년 5월 1일, 광주에서 양화점을 하던 할아버지를 형이 찾아왔다. 서울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던 형은 평소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형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종교인으로 봉사하고 싶어 했다”고 추억했다.

며칠을 함께 보낸 형제는 19일 계엄군이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것을 본 뒤 시위대에 합류했다. 21일도 형제는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함께 있었다. 그날따라 몸이 좋지 않던 할아버지는 형만 남겨두고 먼저 백운동 집으로 돌아왔다. 서너 시간 후 처 할머니가 달려와 “자네가 죽었다고 전화가 왔는데. 어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순간 할아버지는 형이 숨졌다고 직감했다. 형이 있다는 전남대병원으로 달려갔다. 형은 허리 관통상을 입고 병원에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의료진에 말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계엄군이 청년들을 닥치는데로 잡아가 병원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이틀 뒤 병원에 왔을때 형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형은 망월동 시립묘지에 안장됐다가 1997년 5·18민주묘지로 이장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죽으면 형의 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묘를 선산으로 옮길까도 고민했다”며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만큼 형의 묘를 국가에서 관리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10일간의 항쟁기간 동안 희생된 165명 중 115명이 미혼이었다. 박현옥 사무총장은 “유족회 회원 300명 중 80여 명도 직계자손이 없어 형제자매가 활동하고 있다”며 “가족들이 사실상 없는 오월 희생자들을 국가에서 보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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