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노숙인 향해… 車에서 내려 달려간 義人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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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50대, 불 피우다 바지 옮겨붙어
30대 회사원 새벽 귀가중 발견
車에 있던 담요 들고 5분 사투
“보는 순간 살려야겠단 생각뿐”

“뭐야, 뭐야. 빨리 불 꺼야 되는 거 아니야.”

13일 오전 3시 광주 남구 주월동에 있는 한 자동차 수리점 앞 도로. 승용차를 타고 이 도로를 지나던 회사원 김보건 씨(30·사진)와 여자친구 이모 씨는 인도에서 불길에 휩싸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김 씨는 이 씨를 집에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도로 옆 인도에서는 노숙인 A 씨(50)가 자신의 바지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비틀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김 씨와 이 씨는 급하게 승용차를 갓길에 세운 뒤 119에 구조를 요청했다. 그러곤 곧바로 승용차에 있던 담요를 꺼내들고 A 씨에게 달려갔다.

불길이 순식간에 퍼져 A 씨의 바지에서 몸으로 옮겨 붙으려던 순간이었다. 김 씨와 이 씨가 담요를 이용해 3분가량 정신없이 불을 끄고 있는데, 지나가던 동남아 출신 외국인은 입고 있던 점퍼까지 벗어 도움에 나섰다. 세 사람이 힘을 모은 끝에 불은 2분쯤 뒤 꺼졌다.

A 씨는 곧 119구급차에 실려 광주의 한 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A 씨는 허벅지 등에 2도 화상을 입어 병원 치료를 받고 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A 씨는 최근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자 잠자기 전 보온을 위해 가스토치로 종이박스에 불을 지피려다 바지에 불이 옮겨붙었다고 한다. 당황한 A 씨가 손으로 바지를 털어내며 불을 끄려고 했지만 불길은 더 거세게 타올랐다. 위기의 순간 김 씨 등 시민들이 달려와 A 씨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김 씨와 이 씨는 손에 물집이 잡히는 화상을 입었고, 옷은 불에 그슬려 버리게 됐다.

광주 남부소방서는 김 씨 등에게 표창장을 수여할 계획이라고 16일 밝혔다. 김 씨는 “사람 몸에 불이 붙은 것을 보는 순간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태게 돼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이번 일을 겪으며 차 안에 소화기를 꼭 넣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소화기가 있었다면 A 씨를 훨씬 빨리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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