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본격 논란…모호한 개념→해석 제각각

  • 뉴시스
  • 입력 2019년 2월 8일 07시 29분


코멘트
안희정(54) 전 충남도지사가 비서 성폭행 혐의로 항소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가운데 안 전 지사의 1, 2심 판결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 해석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8일 법원 등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지난해 4월 모 대학 교수가 학생들을 상대로 수차례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자 이에 불복해 낸 소송 상고심에서 처음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사회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에 대해 성차별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민감성을 가리키는 의미로 통용된다. 성별이 다른 데서 비롯되는 상황에 대한 이해도 차이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사회, 문화, 관습, 통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역이라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개념이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정책을 입안, 집행, 평가할 때 성별 요구와 차이를 고려하기 위해 ‘성별영향평가 제도’를 시행하거나, 공공예산 편성, 집행, 결산 등 과정에서 성별 영향을 고려하는 ‘성인지예산제도’ 등을 도입하면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법원이 양성평등기본법을 근거로 처음 언급한 ‘성인지 감수성’은 정의가 명확한 법률용어가 아니다. 양성평등기본법 역시 국가기관 등은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를 명시했을 뿐이다.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판결문에 명시하면서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1심은 성희롱을 인정한 반면 2심은 피해자가 교수 수업을 계속 수강한 점 등을 볼 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고, 형사고소하지 않기로 약속한 각서를 공증받기도 한 점 등을 들어 통상적인 피해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해 피해자가 성희롱 사건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희롱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피해사실을 신고한 후에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그에 관한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이와 같이 성희롱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후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하는 판결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에 대해 법원이 그동안 남성 중심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한 것에 대한 반성적인 고려가 담겼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 전 지사 1, 2심 판결 역시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결론은 상이했다. 1심은 “이 사건은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성인 남녀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정의했고, 2심은 “피해자가 처한 특수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런 해석 차이 때문에 성범죄 판결의 예측가능성이 사라지고, 보는 시각에 따라 ‘성인지 감수성’이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서혜진 변호사는 “성인지 감수성이 ‘귀에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쓰이면 안 되지만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실무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직접 쓰기 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구체적인 맥락,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관계, 피해자가 왜 피해사실을 숨길 수 밖에 없었는지 적극 이야기하는 차원이고, 그런 주장 자체가 성인지 감수성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안 전 지사처럼 외부에 알려진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이 구체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용어를 둘러싼 혼란 역시 향후 대법원이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소속 차혜령 변호사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 성폭력 판단기준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지난달 열린 토론회에서 “미성년·장애인 피해자가 아닌 성인 피해자에 대한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 사건은 그동안 판례가 많이 축적되지 않아 위력의 행사 여부에 대한 판단기준이 명확하게 정립돼 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안 전 지사 사건은 선례로서 중요한 의미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시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