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 승소 확정…73년 기다림 근로정신대 할머니 사연은

  • 뉴스1
  • 입력 2018년 11월 29일 15시 03분


“日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한다” 말에 속아 갖은 고초
한국에 돌아왔지만 수십년째 정신적 고통 입어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 ‘소녀’들이 여든을 넘긴 ‘할머니’가 돼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근로정신대 할머니’로 불리는 이들의 기구하고 가슴 아픈 사연이 다시 한번 관심을 모으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89)는 유학 길인줄 알고 떠났다가 ‘지옥’을 경험했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5월 30일. 전남 나주초등학교의 한 6학년 교실에 일본인 담임 교사와 교장, 헌병이 갑자기 들어왔다.

이들은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며 초등학생들에게 ‘유학’을 권유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담임 교사는 반장 양금덕양을 지목했다.

양 할머니는 뛸듯이 기뻤다. 일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단지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설렜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양 할머니는 친구들과 선배 등 24명과 나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로, 여수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했다.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에 짐을 풀자마자 일이 시작됐다. 노동의 강도는 한국에서 예상했던 수준이 아니었다. 독한 시너와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아야 했다. 또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화장실을 가려면 ‘반장’이라고 불리던 일본인에게 맞아야 했다. 식사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남이 먹다 버린 밥을 주워 먹기가 일쑤였다. 고된 노동으로 후각이 마비되는 등 몸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일본에서의 지옥같은 생활이 끝난 것은 해방 이후다. 양 할머니는 1945년 10월이 돼서야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에서 매일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한 고국이었지만 더욱 고된 삶이 이어졌다. 일본에서 일하고 왔다는 이유로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 취급을 받은 것이다.

남자들은 “오늘 하룻밤 같이 놀자”며 놀려댔다. 맞선을 봤지만 일본에서 일했던 사실이 알려지면 남자들과의 연락은 끊겼다.

일본에서의 끔찍한 생활을 버티고 견뎌냈지만 광복 후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저기 ‘위안부 할머니’가 지나간다”는 수근거림이 들린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착각한 사람들의 말이다.

김성주 할머니(89)는 1944년 전남 순천 남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일본에 가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일본에 갔다.

일본인들의 거짓말에 속아 아버지의 도장을 훔치면서까지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에 왔지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어린 나이에 절단기를 이용해 금속판을 절단하는 일이 주어졌다.

안전장치는 커녕 장갑조차도 지급받지 못한 상황에서 일을 했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절단기에 왼쪽 손가락 하나가 잘린 것이다.

1944년 12월에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무릎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제대로된 치료는 기대할 수 없었다.

어느날 “한국에 있는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조건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갈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여동생도 “일본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 일본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다. 결혼은 했지만 일본에 다녀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또다른 원고인 박해옥 할머니(88)도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학교장의 권유로 동원됐다. 갖은 고생을 하고 한국으로 왔지만 각종 오해를 받았다.

결국 남편과 불화까지 생기는 등 정진적인 고초를 겪었다.

이동련 할머니(89)도 나주초등학교 6학년 재학 중이던 1944년 일본인 담임선생의 권유로 일본으로 갔다가 힘든 생활 끝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4명의 할머니들은 2009년 일본 후생연금 99엔 사건의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원고들 중 가장 고령자인 김중곤 할아버지(94)는 유족으로 이번 소송에 참여했다.

1944년 여동생 고 김순례씨와 부인 고 김복례씨가 미쓰비시중공업에 동원된 것과 관련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김 할아버지의 여동생은 강제동원된 지 7개월여 만에 발생한 도난카이 지진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원고 5명은 모두 고령인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입원을 하는 등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원고들 중 1명만 재판에 참석하고 4명은 병상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양금덕 할머니는 재판 결과를 병원에서 TV를 통해 확인한 뒤 “일본이라면 이제 징그럽다. 마음을 잘 써야 한다”며 제대로 된 사과와 손해배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광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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