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개 ‘法의 허들’ 앞에 그녀들이 또 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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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카 피해 여성들 고소부터 배상까지 ‘산넘어 산’


지난해 김은혜(가명·25·여) 씨는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때는 몰랐다. 지옥이 시작됐다는 걸…. 얼마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전 남자친구가 몰래 찍은 성관계 장면이었다. 김 씨의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 신분증까지 공개됐다. 김 씨는 경찰에 고소하며 “영상을 또 유포할 수 있으니 전 남자친구를 구속하고 압수수색 해달라”고 요청했다. 경찰은 “영장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넘겨진 전 남자친구는 벌금 350만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김 씨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같은 영상이 또 유포됐다. 전 남자친구가 원본 영상을 다시 퍼뜨렸다. 김 씨는 “처음부터 경찰이 원본을 압수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가슴을 쳤다. 김 씨의 지옥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 넘기 힘든 법과 공권력의 ‘허들’

몰래카메라(몰카)와 같은 불법 촬영과 유출 사건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그만큼 피해 여성도 많다. 문제는 수사와 처벌 과정에서 또 다른 ‘고통’에 맞닥뜨리는 피해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본보가 몰카 피해 사례를 분석한 결과 고소부터 △수사 △기소 △재판 △신상공개 △배상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허들’(장애물) 앞에 서야 했다. 사법적 해결의 첫 단계인 고소부터 만만찮다. 피해자가 경찰에 피해 사실을 알리고 고소하려면 음란사이트에 올라온 영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직접 캡처해야 한다. 음란물인 걸 인정받으려면 특정 신체 부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고소 후에도 적극적인 수사를 장담할 수 없다. 유출자의 인터넷주소(IP)가 해외에 있으면 십중팔구 수사가 신속히 진행되기 어렵다. 구속이나 원본 압수수색이 늦어지면 2차 피해 발생은 뻔하다. 대학생 박영은(가명·25·여) 씨는 지난해 신분증과 함께 누드 사진이 유포됐다. 박 씨가 캡처한 사진을 들고 경찰서를 찾았지만 “얼굴과 성기가 흐릿하고 유출자 IP가 해외라 추적 수사가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박 씨는 결국 고소를 포기했다.

기소 단계에서 포기하는 피해자도 많다. 한미연(가명·18) 양도 상체가 노출된 자신의 사진이 유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전 남자친구는 범행을 자백했다. 기소 직전 담당 검사는 한 양에게 “스스로 찍은 사진인 데다 (성기가 나온) 음란물이 아니라 처벌도 쉽지 않을 것 같으니 합의금이라도 받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한 양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고 말했다.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기소율은 2010년 72.6%에서 2016년 31.5%로 떨어졌다. 몰카 범죄 실태를 다룬 박사논문을 펴낸 김현아 변호사는 “피해자와 합의를 권하는 일이 많고 가해자가 초범인 경우 기소유예나 불기소 처분 경향이 높아 기소율 자체가 낮다”고 분석했다.

○ 처벌보다 더 어려운 피해 구제

재판에 넘겨진 가해자에게 좀처럼 실형이 선고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일부 판례를 살펴보면 법원은 불법 촬영 행태보다 촬영물의 음란성을 기준으로 유·무죄를 판단한다.

2014년 짧은 치마를 입은 20대 여성에게 따라붙어 뒷모습을 촬영한 남성에게 재판부는 “피해 여성의 옷차림이나 노출 정도가 공개된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에 가깝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를 위한 ‘사후 보호’는 사실상 전무했다. 몰카 범죄의 경우 벌금형 이상이 확정되면 가해자의 신상정보가 등록되고 재판부 결정에 따라 공개 대상에 포함된다. 하지만 신상공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2011년∼2016년 4월 서울지역 법원의 1심 판결 1540건 중 신상정보 공개 및 고지가 결정된 건 7건뿐이었다. 가해자에게 위자료 배상을 신청하는 배상명령제도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피해자가 유포된 사진을 삭제하려면 한 달에 200만 원이 든다.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구제를 포기하는 피해자가 있는 만큼 국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최지선 aurinko@donga.com·이지훈 기자
#몰카#불법유출#불법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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