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의 뜻, 후세에 전하자” 시민들 후원 열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2일 03시 00분


광주 백범기념관에 121명 후원… 사업비의 40% 후원금으로 충당
“도피 시절 호남과의 인연 알리자”… 보성군 은거기념관도 재개관
주민 100여 명이 지킴이 역할

의향(義鄕)인 광주전남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이 두 곳 있다. 두 기념관은 백범의 큰 뜻을 배우고 후세에 전하려는 시민들의 후원과 관심이 운영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백범문화재단은 2015년 문을 연 광주 동구 학동 백범기념관 운영에 121명이 후원을 하고 있다고 11일 밝혔다. 안종일 백범문화재단 이사장과 최상준 남화토건 부회장, 허정 에덴병원 원장 등이 대표적인 후원자로 알려졌다. 이들의 기부는 백범기념관 운영과 사업비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백범기념관은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광주백범기념관, 전남 보성의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 등 세 곳이 있다. 홍소연 전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장(60·여)은 “전국적으로 김구 선생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념관을 만든 곳은 광주와 보성뿐”이라고 말했다.

광주백범기념관은 김구 선생의 애민사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9월 광주 대성초등학교에서 김구 선생을 환영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에 앞서 독립운동가이자 광주시장이던 서민호 선생(1903∼1974)이 환영사를 낭독했다. 서 선생은 “광복 이후 고국에 돌아온 동포들이 거처할 곳이 없어 광주천변에서 움막을 짓고 힘들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백범은 광주천변에 사는 동포들의 거처 마련을 당부했다. 그러면서 남부지역을 순회하면서 받은 성금과 특산품을 쾌척했다. 이에 서민호 선생 등이 동참해 12m² 넓이의 집 100채를 짓고 동네이름을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기 바란다’는 뜻으로 백화마을이라 했다. 2011년 주거환경개선 사업으로 백화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서자 광주시는 역사공원(2454m²)을 조성했다.

백범문화재단은 2015년 10월 국비와 시비를 받고 최상준 남화토건 부회장이 후원한 3억 원으로 광주백범기념관을 지었다.

광주백범기념관은 연면적 488m²로 전시실과 교육장, 주차장을 갖췄다. 전시실은 백범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주제로 1876년부터 1949년까지 생애를 국내외 독립과 통일운동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전남 출신 독립운동가 1016명도 만나 볼 수 있다.

광주백범기념관이 각계에 알려지면서 2016년에는 3000여 명, 지난해에는 7000여 명이 다녀갔다. 장선미 광주백범기록관 기획실장(40·여)은 “후원자들의 기부가 없으면 운영이 힘든 상황”이라며 “더 많은 시민들이 백범기념관을 찾아 겨레 사랑 정신을 배우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은 11일 ‘청년 김구의 120년 전(前) 전라도 길’이라는 전시회를 개막했다. 전시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9주년, 백범 김구 선생의 전라도 잠행 120주년을 맞아 백범과 전라도의 인연을 새롭게 조명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2006년 세워진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은 기능보강 공사와 전시시설 개편을 마치고 전시회와 함께 재개관했다.

백범은 1896년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를 살해하고 체포돼 사형이 확정됐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됐다. 인천 감옥에서 복역하던 백범은 1898년 탈옥해 피신할 만한 곳을 찾아 삼남지방을 유랑했다. 당시 보성을 지나던 중 송곡면 쇠실마을에 45일 동안 머물렀다.

쇠실마을 주민 100여 명은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의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김태식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 관리위원장(77)은 “기념관이 관람객들에게 김구 선생과 전라도의 인연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김구 선생#백범기념관#후원#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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