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몹쓸 손’… 예비 나이팅게일은 성추행에 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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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학회, 간호학과 4학년 설문조사
쳐다보고 쓰다듬고 음담패설 등… 실습학생 절반이 성적피해 경험
가해자에 환자-보호자外 의사도 포함
47%만 피해 알려… 홀로 ‘속앓이’
“적극 대처 위한 교육 강화해야” 지적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A 씨는 최근 “꺅” 하는 비명 소리를 듣고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올해 초 이 병원에 실습을 나온 간호학과 4학년생 B 씨가 흐느끼고 있었다. 입원 환자가 B 씨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춘 것. B 씨는 얼마 전에도 병실 커튼을 치자 다른 환자가 엉덩이를 쓰다듬었다고 호소했다. 병원 측은 B 씨의 충격을 고려해 2주간 휴가를 줬지만 그는 끝내 병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A 씨는 “몸이 아프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핑계를 대며 간호 실습생을 노리고 괴롭히는 환자가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환자의 생명을 구한다는 자부심으로 간호사의 길을 택한 간호대생의 절반이 병원 실습 도중 환자와 보호자로부터 성적(性的) 피해를 당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성건강간호학회는 지난해 5, 6월 간호학과 4학년 재학생 191명(여성 173명, 남성 1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한 번이라도 경험했다는 응답이 97명(50.8%)이었다고 8일 밝혔다. 이 중 남성 피해자는 5명이었다. 간호학과를 졸업하려면 병·의원이나 보건소 등에서 1000시간 이상 현장실습을 해야 한다.

가장 흔한 성추행은 고의로 몸을 쓰다듬는 경우였다. 간호사 C 씨는 “실습 당시 체온을 재거나 수액을 교체할 때 꼭 손이나 허벅지를 스치듯 쓰다듬는 환자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피해 경험자 44.3%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밝혔다. 포옹하거나 몸을 밀착시키는 행위(30.9%), 엉덩이 등을 만지는 사례(27.8%)도 흔했다.

언어적, 시각적 성희롱도 심각한 상황이다. 피해 경험자 40.2%는 환자가 특정 신체부위를 빤히 쳐다봐 불쾌했다고 답했다. 음담패설(26.8%)이나 외모를 성적으로 평가하는 말(15.5%)을 들었다는 실습생이 적지 않았다. 환자가 대놓고 성기를 꺼내 보여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응답은 8.2%였다.

하지만 성적 피해를 당한 실습생 중 대학이나 병원 간호부에 피해 사실을 알린 경우는 47.6%에 불과했다.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모르거나 가해자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가족과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32.5%)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4.7%)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번 조사에선 가해자가 주로 환자나 보호자로 나타났지만 간호계에서는 가해자가 의사인 경우도 많다고 지적한다. 간호학과 4학년생 D 씨는 올해 초 지방의 한 종합병원에서 실습을 하다가 “공짜로 자궁 검사를 해주겠다”는 의사의 요구에 시달리다 못해 실습 병원을 옮겼다. 병원장이 의료기기를 건네받을 때마다 실습생의 손을 쓰다듬었다는 제보도 있었다.

실습생들은 공통적으로 “도움을 청해도 병원이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이번 조사를 실시한 연구팀은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대학과 병원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성추행#간호사#성적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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