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성향 판사들을 중심으로 법관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인정하는 게 바로 ‘법관의 독립’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법관의 정치색은 판결의 공정성 침해로 이어진다는 반박이 나오고 있다.
법원 안팎에선 진보 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김명수 춘천지법원장(58·사법연수원 15기)이 새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뒤 판사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게 당연하다는 주장이 공론화됐다는 분석이 많다.
○ “정치색 없는 법관 동일체… 환상” 주장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으로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오현석 인천지법 판사(40·35기)는 30일 법원 내부 게시판에 ‘재판과 정치, 법관 독립’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과거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에 판사들이 법률기능공으로 역할을 축소시켜 근근이 살아남으려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심리적 작용이 있었을 것”이라며 “정치색이 없는 법관 동일체라는 환상적 목표 속에 안주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재판이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은 측면이 있다”며 “개개의 판사들 저마다의 정치적 성향들이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판사는 법관의 정치적 성향을 인정하는 게 법관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편 뒤 “남의 해석일 뿐인 대법원의 해석, 통념, 여론 등을 양심에 따른 판단 없이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우에 따라 대법원의 판례를 무시한 판결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오 판사는 이달 중순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10여 일간 단식을 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 후보자가 22일 양승태 대법원장을 면담한 뒤 법원행정처 차장이 인천지법을 방문하자 단식을 중단했다.
또 일부 진보 성향 판사들은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선 결과 등과 관련한 정치색 짙은 의견을 공개해 논란이 됐다.
○ “정치권력과 결탁하자는 건가”
법원 내부엔 오 판사의 주장에 반대하는 판사들이 적지 않다. 설민수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48·25기)는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오 판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설 부장판사는 “(법관의 정치적 성향) 논의가 법관이란 지위와 결합되었을 때는 그런 논의조차 삼갈 필요가 있다”며 “정치적 논리로 보기 쉬운 판결을 지속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에서 공격을 차단하고 재판과 재판기록, 그리고 법리에 의해 판단했다고 우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방어 방법을 스스로 걷어차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 고등법원의 부장판사는 “공정한 재판을 할 의무가 있는 판사는 정치 지향성이나 어떤 예측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며 “그게 사법부의 존립 근거”라고 강조했다. 부산지법의 한 판사는 “‘법관의 독립’은 판사가 자신의 신념대로 판단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한 게 아니고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오 판사의 주장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자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정치 성향을 드러낸 채 재판하는 판사들은 헌법상 탄핵 대상”이라고 말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한 헌법 103조에 위배된다는 의미다.
한 원로 법조인은 “헌법이 규정한 법관의 양심은 일반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법관의 직업적 양심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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