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교육 문제점-해법’ 전문가 좌담
동아일보-한국교양기초교육원 공동기획 대학 교양교육 혁신의 길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세분화된 대학 전공과 기술의 의미가 감소하는 시대. 습득과 암기보다 응용과 소통이 중요한 시대에 교양교육은 어떤 새로운 의미를 지닐까. 우리나라 대학 교양교육의 현실적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그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 온 전문가들의 진단을 들어봤다.
윤우섭 원장, 손동현 교수, 홍성기 회장(왼쪽부터)이 우리나라 대학 교양교육의 문제점과 해법에 대해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누고 있다. 세 사람은 “교양교육의 정상화가 대학 정상화와, 나아가 사회의 정상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사회=교양교육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무엇이 문제인가요. ▽손 교수=현재 우리나라 대학교육은 국제 경쟁력 부문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초학문 분야가 소홀하다는 점입니다. 교양교육을 손쉽고 가볍게 생각한 결과 ‘잡비학(雜卑學·잡스럽고 비천한 학문)’이란 자조적 표현까지 등장했습니다. 전공 교수들이 자기 학과 학생만 챙기고 교양과목 강의는 피하기 때문입니다. 시각을 넓혀 여러 전공 학생을 대상으로 한 기초 교양과목 확대에 힘을 쏟아야 기초학문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윤 원장=교양교육은 전공교육과 함께 대학교육을 이끄는 두 기둥입니다. 그런데도 교양교육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엔 교육부가 시행하는 ‘학부교육 선진화사업(ACE)’과 ‘산업연계교육 활성화 선도대학사업(PRIME)’에 교양 부문 평가가 들어갔어요. 외부의 자극에 의해 교양교육 개선 움직임이 일어나는 셈입니다. ▽홍 회장=교양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10년 후 사회의 직업 상황이 어떨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빠르게 습득해 산업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표준적 지식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습득한 지식이 10년 뒤 현장에서 응용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죠. 따라서 바로 응용 가능한 지식보다 창의적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죠. ▽윤 원장=각 대학의 교훈에는 대체로 ‘세계관, 도덕, 인격, 애민, 문화, 진리, 창조’와 같은 가치가 들어 있습니다. 이 가치들은 대부분 교양교육을 통해 길러져야 할 가치들입니다. 따라서 교훈들은 이미 교양교육의 강화를 요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회=내년 인문한국(HK)지원사업 10년을 앞두고 학문 후속세대의 교수 임용 여부를 놓고 대학에 회오리가 불 것이라고 하는데요. ▽손 교수=인문학 전공자들이 중간에 좌절하는 이유는 전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위를 끝내면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대학 말고는 없죠. 공대도 철학을 가르치고 의대도 역사를 가르쳐 이들에게 자리를 제공해야 합니다. 현재의 정부 재정지원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원이 끊기면 그걸로 끝입니다. 사범대학 제도도 학문 인구의 저변 확대 관점에서 보면 문제입니다. 사범대 학과들을 보면 모두 기초학문을 담당하는 학과와 중첩돼 있습니다. 과를 나누기보다는 수학과 졸업생이 교육대학원에 가서 교원자격 과정을 밟아 교사가 될 수 있다면 수학과에 가는 학생도 늘겠죠.
▽홍 회장=학령인구가 크게 주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문과와 이과가 통합되면 8 대 1, 심지어 9 대 1 수준으로 이과 계열이 압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도 취업에 취약한 인문·사회·자연대는 더욱 위축되겠죠.
▽사회=위기라고 말하지만 문사철(文史哲) 학과들이 정원 감축이나 전공 융합 같은 자구노력에 소홀하지 않았나요.
▽손 교수=교양교육 과정을 보면 인문학이 절반 이상입니다. 전국에 철학과가 10여 년 전 57개였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지요. 현 제도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10개 정도로 줄여야 합니다. 그 교수들은 교양교육을 담당하면 됩니다. ‘겨우 교양교육을 가르치란 말이냐’고 반발한다면 그것이 잘못이죠. 철학 교수는 철학과에 소속돼야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교양교육에 대한 인식이 낮기 때문입니다. 학과 이기주의를 고집하다가 학생이 줄어 결국 폐과되는 상황을 극복해야죠. ▽윤 원장=정원 감축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정원 감축에 대해서는 학내 반발이 무척 큰 데, 교수들로 하여금 전교생을 내 강의의 수강자로 만들겠다고 인식을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 정원 감축도 큰 어려움 없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융합은 기초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기초를 얼마나 탄탄하게 만들 것이냐를 논한 연후에 융합을 이야기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홍 회장=강의 수요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현재 교양교육이 파행인 겁니다. 현재 교수들은 시야가 자기 학과에만 치중돼 있습니다. 대학원 등록금을 지원해 준다고 기초학문이 활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원에 못 가는 게 아니죠. 강의 수요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대학들은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튀는’ 제목의 인문학 지원서를 내놓기에 급급합니다. 시간강사 비율도 교양교육 쪽이 가장 높습니다. 강사료도 국공립 대학은 그나마 나은 편인데 지방, 사립으로 갈수록 차이가 크고 열악합니다.
▽사회=기초 교양학문 전공자들의 진로가 별로 없는 것도 큰 문제 아닙니까.
▽손 교수=제자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하면 ‘오지 말라’고 합니다. 외국에 가서 공부하라고 해요. 국내 대학은 학업의 양과 질이 모두 떨어집니다. 일본을 보면 1950년대부터 외국에서 취득한 학위가 오히려 잘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 나름대로 지식생태계가 일본 안에서 정립되었기 때문이죠. 반면 우리나라는 21세기가 왔는데도 여전히 지식식민지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 교수를 충원할 때도 국내 학위는 별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윤 원장=대부분의 대학이 교양 전담교수를 비정년으로 임용하고 있는데 연봉이 3000만∼3600만 원밖에 안 됩니다. 이는 그들의 진로가 별로 없다는 것과 대학에서는 특히 글쓰기 교수가 필요하지만 재정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결합되어 나타난 문제입니다. 글쓰기 교수는 보통 과목당 학생 30명을 담당하는데 학생들의 글을 봐주고 토론, 첨삭지도를 하다 보면 교육 부담이 상상외로 큰데 그들에 대한 처우가 열악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자리가 제한되어 있으니 이를 타개할 정책 지원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홍 회장=일본 도쿄대는 교양대학 출신이 사회에서 유능한 제너럴리스트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런 부분이 70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때 일본도 교양교육을 폄하하는 시기가 있었지만 잘 이겨냈고 현재까지 잘 지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에도 시카고대 같은 매우 오래되고 성공적인 교양교육의 사례들이 있습니다.
▽손 교수=윌리엄스대, 웰즐리대, 애머스트대 같은 미국 대학들은 유명 대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초학문 분야를 4년간 집중 교육합니다. 미국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의 학부 이력을 조사해 보니 작은 칼리지를 나온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홍 회장=교양교육은 평생교육입니다. 앞으로의 직업세계는 수시로 변해 개인이 평생 4, 5개 직업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평생 본인이 새롭게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기초 교양교육입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경우 한국 학생들이 최상위권이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을 해서 직장에 가면 학업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기초교육이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사회=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2011년 설립됐는데 어떤 성과가 있었나요.
▽손 교수=초대 원장을 맡아 아무것도 없는 데서 정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에서 교양교육 강화 이야기가 나와 교육부가 예산 10억 원을 마련해 기구가 탄생했죠. 기구는 대학교육협의회에 있는데 활동은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야 하는 등 행정적으로 좀 복잡하게 시작했습니다.
첫해에는 교양교육 연구비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범대학적인 기구가 돼야 하기 때문에 노하우 확산에 중점을 뒀습니다. 대학들이 교양교육에 대해 노하우가 적은 교수들을 상대로 컨설팅을 했습니다. 몇 년 지나다 보니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합니다. 교양기초교육원은 법적 토대가 없는 임의 기구라는 취약점이 있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안 주면 없어지는 겁니다.
▽윤 원장=124개 대학에 대한 컨설팅 사업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3개 대학은 재신청해서 재차 실시했습니다. 컨설팅 효과의 증거입니다. 지방대의 경우 기초 교양학문 분야의 교수 초빙이 어렵습니다. 이를 지원하는 사업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강의 내용을 개발해 인근 대학들이 공동으로 교수를 위촉 관리하는 것입니다.
▽손 교수=‘담당 교수 강사 워크숍 지원사업’ 같은 것이 한 예입니다. 방학 때 철학이면 철학 과목 교양교육을 담당하는 교수, 강사가 모여서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지 논의하는 모임에 지원이 필요합니다.
▽홍 회장=앞으로 할 일도 많습니다. ‘고전 아카이브’ 같은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외국의 경우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같은 아카이브를 통해 고전 텍스트를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마련해 놓으면 중고교생을 비롯해 누구나 고전을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죠.
▽사회=교양교육 활성화를 위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손 교수=‘소프트웨어 리터러시(literacy)’ 같은 디지털 기술도 기초학문의 개념에 넣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이제는 디지털 기술도 생활과 현업에서 꼭 배워야 하는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윤 원장=기초학문을 인문학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연과학 물리학 같은 이과 계통의 기초학문도 포괄하는 것이 기초학문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교양교육의 분류체계가 교육학의 하위 개념으로 되어 있어 각종 연구 지원 등에서 불리한 점도 개선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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