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태백소방서 소속 허승민 소방위(46)에게 3일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 딸의 백일이었다. 나이에 비해 비교적 늦게 결혼한데다 올 1월 결혼 2년 만에 태어난 첫 딸이었기에 애정이 각별했다. 딸의 백일이었지만 이날은 그가 야간조 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대신 백일잔치는 이틀 전인 1일 가족들과 조촐하게 치렀다. 아내(38)와 딸을 집에 남겨둔 채 그는 근무를 위해 오후 5시경 집을 나섰다. 이날은 동해안에 강풍이 예고돼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고원도시인 태백에 부는 바람은 거세졌다. 4일 0시 51분 태백시 동점동에서 강풍 피해 신고가 접수됐다. 곧바로 119대원들이 출동했다. 이후에도 강풍 피해 신고가 잇따랐고 출동 가능한 119대원들은 모두 현장으로 달려갔다. 응급구조사인 허 소방장위 오전 1시 9분 2차 출동 때 동료들과 함께 동점동으로 향했다.
현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나뭇가지들이 부러지고 도로변 3층 연립주택을 덮고 있던 강판 지붕 일부가 뜯겨져 도로에 나뒹굴고 있었다. 주민의 안전 확보가 시급한 상황. 당시 이 일대를 강타한 바람은 순간 최대 풍속이 초속 20m가 넘었다. 일반적으로 초속 20m 정도의 바람이 불 때는 굴뚝이 무너지고, 기와가 벗겨지고, 사람이 걷는 것은 물론 몸의 평형 유지가 힘들다.
대원들은 즉시 도로에 떨어진 구조물을 치우는 등 안전 조치 활동을 벌였다. 오전 1시 26분경 연립주택 옥상에 남아있던 강판 지붕 일부가 강풍에 뜯겨져 날아와 순식간에 허 소방위와 함께 있던 동료 강태희 소방장(45)을 덮쳤다. 수백 ㎏의 강판 무게에다 강풍을 타고 3층 옥상에서 떨어진 탓에 그 충격은 대단했다. 강판 지붕을 머리에 맞은 허 소방위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안전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강 소방장은 머리 부분은 피했지만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다.
동료 대원들은 즉시 허 소방위를 응급조치한 뒤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의식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내려진 진단은 급성경막하혈종. 구조헬기를 동원해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겼지만 소생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태백의 병원으로 다시 옮겨져 힘겨운 사투를 벌이던 허 소방위는 끝내 12일 오전 8시 16분 세상을 떠났다.
허 소방위는 2003년 소방공무원에 임용돼 그동안 홍천 정선 태백소방서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재난과 사고 현장에서 생명을 구조했다. 그의 동료들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었다”며 “충실한 가장일 뿐만 아니라 부모님께 늘 효도하는 아들이었다”고 전했다. 최영수 태백소방서 현장대응과장은 “자신의 업무인 응급구조 관련 책을 항상 가까이에 두고 공부하는 학구파로 매사 자신의 업무에 빈틈이 없는 열정적인 대원이었다”고 말했다. 한 동료는 “딸이 최근 뒤집기에 성공하고 낮은 포복을 한다고 바보처럼 자랑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원도소방본부는 사고 당시 소방장이던 그를 소방위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또 국가유공자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허 소방위의 빈소는 태백시 문화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14일 오전 10시 태백소방서에서 강원도청장(葬)으로 열린다. 고인은 영결식 후 국립대전현충원 소방관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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